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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바위 사람들은 우리가 그곳에 머무는 동안 우리에게 작은 집을 내주었습니다. 그 집에 사는 젊은 남자와 그의 아내는 언덕 아래 마을에 머물렀습니… 지난봄에 제가 관심을 갖게 된 여인이 또 한 명 있습니다. 그녀는 보통 한국 여성들보다 더 크고 곧은 몸매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녀의 얼굴은 한국인… 박사님의 편지는 잘 받았습니다. 저는 언어를 습득하는 문제에 있어서 박사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만약 제가 이 언어를 익히지 못한다면 … 당신이 웰본 부인과 함께 북부 관할 구역을 다녀온 여행에 대한 9월 3일 자 편지를 잘 받아보았습니다. 나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이 여행의 모든 세부 … 연례회의 직후 무어 씨가 미국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저의 한 해 사역은 생각했던 것과 매우 달랐습니다. 사역을 감독하는 데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할애… 아서의 일기 5월 9일 – 오늘 10시 30분에 동소문을 통해 서울을 떠났다. 12시가 되기 전에 강을 건넜다. 10리 정도 간 다음 점심을 먹었다. 오후에는 30리… 우리는 9월 15일 토요일 오후 2시에 샌프란시스코를 떠났다. 일행 중 한 명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한 시간이 지연되었다. 나는 그날 아침 내내 매우 바… 아서 웰본 선교사는 1900년 내한하여 황해도 배천, 강원 원주와 경북 안동, 영주, 문경, 상주, 봉화, 대구 등 우리나라 구석구석을 누비며 오지에 복음을 … 윤치호는 귀국 후 기독교 교육활동에 많은 관심과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내 백성에게 복음을 전하고 교육하는 것이 바로 그 사명이다’라고 자신의… 윤치호와 우남 이승만이 개인적으로 접촉하게 된 시점은 윤치호가 귀국한 후 배재학당에서 강의를 했을 당시로 추정된다. 이에 대해 전택부는 윤치호… 윤치호는 한국의 첫 번째 남감리교회의 교인이 되었다. 그는 상해 중서서원(中西書院)의 학생으로 있던 1887년 4월 3일, 20세의 나이로 세례를 받았다. 이… 우남이 서재필로부터 신앙적인 영향을 받았다는 기록을 찾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서재필로부터 배운 서양의 역사와 정치사상을 통해 그는 얼마든지 … “한국교회는 병원에서 태어났습니다. 1885년 6월 21일 주일 저녁, 알렌 선교사 부부와 헤론 부부, 스크랜턴 의사의 어머니가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1895년 말에 미국 시민권과 의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귀국한 서재필 박사가 1896년 5월부터 매주 목요일 배재학당에서 실시하는 세계 지리, 역사 및 정치… 서재필은 조국으로 돌아온 다음 아펜젤러의 집에 머물면서 1896년 민중계몽을 위한 ‘독립신문’을 발행하는 한편 배재학당을 통하여 학생들을 가르치… 원주 도성에 복음을 전한 첫 선교사들이 다녀간 지 이미 한 세기가 훌쩍 넘었다. 늦은 감이 있지만 오는 9월 초 원주선교 관련 초기 사진 자료를 발굴·… 원주 지방에 개신교 선교 초기 처음 복음이 어떻게 전해졌는지에 대한 명확한 자료는 아직 밝혀진 것이 많지 않다. 다만 원주 지방 초기 선교역사는 몇… 1894년 갑오개혁이 이루어지면서 갑신정변으로 서재필 등의 급진개화파에게 내려진 역적의 죄명이 벗겨졌다. 서재필은 망명 중 미국에 들른 박영효의 … 배재학당은 설립 초기부터 기독교 정신을 가르치려고 노력하였다. 복음(福音)을 가르치고 전하는 것은 아펜젤러가 조선에 온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