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성경 판매 부수의 80% 이상이 남녀 매서인들이 판매한 것
교회 성장에 부인매서인, 전도부인들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

Ⅴ. 부인매서인(전도부인, Bible Women)

대영성서공회(BFBS) 본부 발행 연례보고서에는 남자매서인 통계만 나오고 부인매서인 명단과 통계는 전혀 없다. 다만 서울에서 밀러가 작성한 한국 연례보고에는 1917~1938년의 부인매서인 통계가 있다.(1915년 경성 권서대회 참가자는 모두 남자로서 178명이 참가했다.)

장성진 박사는 “근대 시기 성서공회에서 일하며 성서를 판매하는 여인들이 전도부인의 기원”이라며 “성서판매와 복음전도를 함께 했던 전문 여성 선교요원들”이라고 설명한다.

부인매서인들의 모습.
▲부인매서인들의 모습. ⓒGCAH Digital Gallary
1. 첫 전도부인

한국교회에 여 전도사는 언제부터 생겼을까? 남자 전도인 양성은 1887년 10월 9일 정동에 별도의 집 ‘베델’을 마련하여 7명의 신학도로 ‘신학교’(Theological School)가 시작되었다.(1888년 감리교회 통계표 참조)

당시 한국의 문화와 관습에 의하여 남녀가 한자리에 모여 예배를 드리거나 교육받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1888년 1월 스크랜튼(M. F. Scranton) 집에서 한국 최초의 ‘여성주일학교’(女性主日學校, Sunday School)가 시작되었다. 곧이어 3월 11일에는 ‘여성교회’(女性敎會, Women’s Church)가 21명의 한국인 여성으로 설립되었으며, 이 때 2명의 전도부인들(Bible Women)이 세워져 이들이 한국의 첫 여교역자(女敎役者)인 셈이다.

무명의 첫 전도부인들은 여성교회의 전도부인(傳道婦人, Bible Woman) 2명이며, 딸이 이화학당에 다니는 학생의 어머니들로서 스크랜튼 여사의 주택에 살며 돕던 분들이다. 두 명의 전도부인은 1886년 6월 이화학당(梨花學堂, Pear Flowers School)의 첫 고정학생인 ‘별단이’와 두 번째 고정학생인 ‘꽃님이’ 어머니인 것으로 보인다.

전도부인은 1889년 가을부터는 공개적으로 채용되었고, 본격적인 지방전도활동으로 확산되었다. 스크랜튼의 미국 북감리교 해외여성선교부(WFMS) 선교보고에 처음 밝혀진 전도부인은 이드르실라(Druscrilla, 이경숙)였고, 겨울(12월)에 임명된 3명은 ‘프리스실라(Priscilla)와 Sara, 우리의 소녀 엄마’였다.

2. 부인매서인(1896년 BFBS 연례보고서에 처음 나옴)

부산의 아담슨(Mr. Adamson) 씨에 대한 보고서의 일부다.

“무어(Miss Moore) 양은 그녀가 과거에 감독했던 부인매서인들의 사역을 매우 높게 평가한다. 그리고 그녀의 복음서 판매 실적을 보면, 그녀는 다른 어떤 남성 매서인들만큼 잘한 것으로 보인다. 그 부인매서인은 비록 대부분의 활동은 부산과 그 근방에 국한되었지만, 때때로 내륙으로 상당한 거리를 여행했다. 그녀는 매우 진지하게 보이고, 비록 때때로 너무 만용을 부리지만, 나는 이를 이해한다.

그녀는 성서를 파는 것뿐만 아니라 어디를 가든지 자신과 같은 여성들에게 복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집안으로 들어갈 기회가 주어지면 집안에서 읽어준다. 12월 31일까지의 매출 실적은 모두 67부에 달했다. 무어 양은 저에게 그 부인매서인의 사역을 보고하는 문제를 부탁했으며, 위의 실적 보고도 그에 따른 것이다.”

부인 매서인
▲성경을 판매하는 부인 매서인. ⓒGCAH Digital Library
3. 교회 리더로서의 전도부인

한국교회 초기 유명한 전도부인들은 1918년 3천여 성도 앞에서 설교하며 쪽복음서 1천7백50권을 판매한 원다비다, 국경에서 활동한 신마리아, 제주도의 전도자로 파송된 김신경 등이 있다.

그들은 “교회를 세우고, 기도모임을 이끌고, 성경반을 가르치고, 새신자를 돌볼 뿐 아니라 주일학교까지 운영하며 교회 성장의 밑거름이 됐다”고 선교사들은 평가했다.

4. 감리회연회보고에 나타난 전도부인

1) 1920년 전도부인에게 권사 직분을 부여, 1차 담임목사, 2차 지방회에서 임명했다.

2) 1934년 감리교회 통리자 강설
“그러나 우리 장정을 보면 전도부인의 사업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전도부인’이라는 글자도 없이 되었습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과거 4년간에 불편한 점이 많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금번 총회에서는 전도부인에게 대한 규칙을 제정하여 사업 진행에 지장이 없도록 하기를 바랍니다.”

3) 전도부인 통계
한편, 장성진 논문은 한국교회 초기 전도부인의 숫자를 담은 통계를 통해, 전체 전도부인 중 감리교회 소속이 7백17명, 장로교 2백9명, 성결교 1백38명, 기타 교단 1백51명으로, 총 1천2백15명 중 절반 이상이 감리교회에서 활동했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4) 성결교단 경성성서학원을 통해 배출된 전도부인
1913년 최재은 1명
1914년 나영은, 허순성 2명
1915년 이유겸, 곽진근 2명

5) 전도부인 사역 형태
1898년 안식년에서 돌아온 스크랜튼 선교사는 자신의 전도사업의 목적을 설명하는 보고서에서 전도부인들의 역할을 예찬하고 있는데, 이 때 그는 8명의 전도부인을 데리고 일하고 있었다고 한다. 감리교여선교회에서 고용한 3명의 전도부인과 대영성서공회에서 고용한 5명의 전도부인이 바로 그들이었다.

5. 원주 지방에서 활동한 전도부인

왼쪽부터 원주 지방에서 활동한 전도부인인 안경숙, 김몌례, 전밀라, 박분조
▲왼쪽부터 원주 지방에서 활동한 전도부인인 안경숙, 김몌례, 전밀라, 박분조
1) 원주선교부 파송 첫 전도부인, 안경숙(安瓊淑): 1915년
개화 초기 당시 한국의 문화와 관습에 의하여 남녀가 한자리에 모여 예배를 드리거나 교육 받을 수 없었다. 1916년 박원백 감리사 보고에는 “마커(Miss Marker)양이 2회의 사경회를 개최했고, 프레이(Miss Frey) 양이 2명의 전도부인을 보내줬다”라고 나와 있다.

따라서 원주선교부에는 이미 1915년에 2명의 전도부인이 사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당시 1명은 원주서미감병원 앤더슨 조사의 부인 클라라(Clara)로 앤더슨 의사를 도와 여성 환자를 심방하며 전도했다.

원주에 파송된 첫 전도부인은 바로 강신화 목사와 함께 사역한 안경숙1) 전도부인이다.

※ 원주선교부의 전도부인, 전도사: 1915 안경숙, 클라라, 1917 원견신, 이로이스, 1920 사화순, 김몌례, 1924 민원숙, 전수산라, 1926 김몌례, 1928 김몌례, 1929 김몌례, 이진복, 허순용, 1935 엄길섭, 엄은순, 1935 전밀라, 박분조

2) 김몌례(金袂禮): 1920~1929년
원주제일교회100년사 기록에는 김몌례 전도부인이 1920년부터 1929년까지 10여 년간 사역한 이름이 나오지만 그에 관한 상세한 사항은 찾을 수 없다.

3) 전밀라(全密羅): 1935년
1935년에 전밀라 전도사가 여자사업부 최초의 사역자로 원주에 왔다. 본처전도사(전연득)의 딸로 감리교신학교를 졸업했으며, 소임을 잘 감당할 만한 젊고 역량 있는 여성이었다. 원주 선교부는 그 후에 간호학교를 졸업한 간호사, 이화여전을 졸업한 박분조가 합류하여 함께 사역했다. 이 세 사람과 레어드 선교사, 구역 전도부인, 유치원 교사들, 기독여자관 사역자들과 함께 원주 지역에 복음의 씨앗을 심고 물을 주면서, 자라게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했다.
원주선교부에 파송된 최초의 여 전도사 전밀라(全密羅)는 제천에서 출생해 충주보통학교를 마치고 공주 영명학교를 거쳐 감리교 신학교를 졸업 후 1955년 한국 여성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았다.

4) 박분조(朴蕡祚): 1935년
강릉 삼척교회 출신으로 원주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박분조는 나애시덕 선교사의 후원으로 이화여전 영문과를 졸업했다. 1935년 원주선교부에 여선교사들의 통역과 행정을 전담하는 선교부 직원으로 박분조 전도사가 파송되었는데, 박분조는 강릉지방에서 최초로 대학을 졸업한 여성으로 원주선교부에 파송된 직원이었다.

Ⅵ. 맺는말

지금까지 필자는 성경이 어떻게 우리나라에 전파되기 시작했으며, 성경반포의 주역인 매서인과 전도부인들의 사역에 대해 고찰해 보았다. 계속해서 강원도 지방 교회 설립의 선구자였던 매서인과 교회성장의 주역이었던 전도부인(여전도사)들에 관해 살펴보았다.

성경 반포의 실제적인 방법은 성서공회 서적부에서 판매하는 것과 서적상들에게 위탁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전체 판매부수의 80% 이상이 남녀 매서인들에 의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초기 우리나라 교회 설립은 바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복음을 전하며 쪽 복음서를 판매하던 매서인들에 의해 수많은 교회가 설립되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러한 매서인들의 이야기는 한국교회사에서 적은 부분만 소개되거나 아주 무시되기까지 했다. 좀 더 확장해서 얘기하자면, 한국 기독교 역사의 중요한 순간에는 언제나 여성이 있었고, 특별히 교회 성장에 부인매서인, 전도부인들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렇게 선교 역사, 교회 역사의 주체임에도 그들의 공헌이 알려진 것은 극히 일부이다.

리진만 선교사
▲리진만 선교사
사도바울이 여성에 대한 언급(고전 14:34)한 이후 지금까지 남성 위주, 남성 중심의 문화 가운데 지속되고 있는 교회역사 기술 행태에 대해 이제 벗어나야 함을 교회역사 연구자들에게 제안한다. 마찬가지로 선교역사의 기술에서도 선교사 중심의 기술에서 탈피하여 그들을 도와 함께 사역했던 조사(助師, 助事), 매서인, 전도부인들의 묻혀있는 이야기들을 발굴하여 알림으로써 교회 성장에 자극이 되고 건강한 미래의 교회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지적하면서 이 글을 맺는다.<끝>

[미주]
11) 제일감리교회100년사에는 한자 표기가 安敬淑으로 되어있고, 힐만 선교사 1916년 보고서에는 In Kyung Sook으로 표기됨

리진만 우간다·인도네시아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