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웰본 선교사는 1900년 내한하여 황해도 배천, 강원 원주와 경북 안동, 영주, 문경, 상주, 봉화, 대구 등 우리나라 구석구석을 누비며 오지에 복음을 전한 개척 선교사다. 1902년부터 배천은 무어 선교사가 맡고, 철원은 아서 선교사가 나누어 맡아 철원을 중심으로 강원도를 독립구역으로 삼아 관리하였다. 1903년 아서는 철원읍에 선교 부지를 마련했는데, 이 당시 철원읍을 비롯하여 강원도 지역에 교회가 18개, 세례교인 71명과 학습교인 52명을 포함해 전체 교인이 225명에 이르렀다. 1907년에는 철원과 강원도에 세워진 54개 교회에서 1년 동안 860명이 세례문답을 받았고, 그중 108명이 세례를 받았으며 265명이 학습인 명부에 올랐다.

지금부터 소개하는 일기는 미국 북장로교 서울선교부에 소속되어 활동하며 ‘길 위의 전도자’로 불렸던 아서 웰본 선교사가 서울을 출발하여 철원을 중심으로 강원도 여러 곳을 순행하며 기록한 것이다. 120여 년 전 오지 중 오지였던 강원도 지방에 복음을 전파했던 아서 선교사의 발자취를 함께 따라가 보려 한다. <편집자 주>

※이 일기에 나오는 지명인 회원리, 척산읍, 고작골, 불만동, 덕북골, 손리귀, 성유안, 곶바란, 섭불골, 송곡골, 발, 남창, 염미리(본문 중 붉은색 표시)를 아시는 독자분께서는 신문사 편집부(press@cdaily.co.kr)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서 웰본의 순행 일기 1902년 12월 2일~20일32)

1902년 12월 2일 – 다락원(Tar rok won, 30리).33) 3시 20분에 북동문34)을 지나 서울을 떠났다. 오후 6시 20분에 이곳에 도착했다. 무척 어두웠다. 잠시 후 노부부를 만났다.

12월 3일 – 꽤 잘 잤다. 5시 전에 잠에서 깼다. 6시에 일어났다. 노인의 아들과 며느리가 기독교를 믿는다고 그를 핍박했다. 그들은 우리를 만나려 하지 않았다. 아침 8시 30분에 떠났다. 춥고 서리가 내린 아침이었다. 정오가 되기 전에 40리를 갔다.

동두니(Tong Tu-ni, 60리).35) 오후 4시 30분에 이곳에 도착했다. 무척 피곤했지만 방이 좋고 남자 4명과 여자 3명이 모임에 왔다. 소년들도 몇 명 왔다.

12월 4일 - 꽤 잘 잤다. 새벽에 추워졌을 때 내 등을 따뜻하게 해주던 사람이 그리웠다. 밤에는 비가 왔지만 아침에는 서리가 내렸다. 우리는 9시 30분이 되어서야 출발했다. 회원리(Hoi won-ni)까지 30리를 가서 저녁을 먹었다. 추운 방에 들어서 감기에 걸렸다.

척산읍(Chuck san up, 60리). 오후 5시 15분에 이곳에 도착해서 지난봄에 우리가 묵었던 방에 있는데 그때와는 달리 장판이 깔려 있다. 벼룩이 감바위(Kam bawi)36)에 있을 때만큼 많았다.

혜화문 안쪽 풍경
▲혜화문 안쪽 풍경
12월 5일 - 잠을 잘 잤고 기분도 괜찮다. 바퀴벌레가 엄청 많다. 조사들이 늦게 와서 8시 30분이 되어서야 출발했다. 50리를 와서 배로 두 개의 강을 건넌 뒤 저녁을 먹기 위해 초라한 작은 여관에 들렀다. 길이 험했다. 6시 30분에 이곳에 도착했다. 길을 잘못 들었었다.

고작골(Ko Chok Kol, 80리). 방을 구하느라 힘들었다.

12월 6일 – 방이 추웠다. 밤새 눈이 조금 내렸다. 해가 뜬 후에야 아침을 먹었다. 그 무렵 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정오까지 계속되었다. 10시가 넘을 때까지 모임을 갖지 못했고, 그 집에 사는 사람들만 참석했다. 나중에 두 명이 더 왔다. 예배 후 저녁을 먹고 5리 떨어진 다른 마을로 갔다. 짧은 모임을 가지고 이곳 불만동으로 왔다.

불만동(Pul man tong, 30리). 이곳에서 80세 된 노인을 만났는데 그는 모임에 와서 참석자들 중 누구 못지않게 잘 들었다. 신자이며 문답 받기를 원한다고 했다.

12월 7일 - 지난봄에 우리가 묵었던 낡은 방에서 잤다. 좋고 따뜻했지만 벌레가 너무 많았다. 하지만 벌레들은 나를 찾지 못한 것 같다. 만약 그랬더라도 나는 몰랐을 것이다. 문답이 있었고, 5명이 왔다. 모두 이전에 시험을 치른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아침에 만났다. 야외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너무 추워서 불편했다. 남자 9명, 여자 5명, 남자 2명이 참석했다. 좋은 시간이었다. 그날의 주제는 박해에 대한 것이었다.

12월 8일 – 5시 30분에 일어났지만 한국인들이 너무 느리게 움직이는 바람에 8시 30분이 되어서야 출발할 수 있었다. 덕북골(Tok Puk Kol)에서 잠시 들렀다가 손리귀로 갔다.

손리귀(Son Ri Kui, 50리). 오후 2시에 이곳에 도착했다. 3시가 되어서야 점심을 먹었다. 배가 너무 고파서 과식을 했다. 바로 모임에 갔는데 소화가 안 되어서 불편했다. 시험을 치른 후 잠시 누워 있었더니 조금 나아졌다. 5명을 문답했다. 이곳 사역은 그리 좋지 않지만 나아질 수도 있다. 전 조사는 오후 내내 아팠지만 저녁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훌륭한 설교를 했다.

12월 9일 - 그다지 일찍 일어나지 않았다. 잘 잤다. 집 꿈을 꾸었다. 40리 떨어진 마을로 가서 저녁을 먹은 다음 20리를 더 가서 밤을 보내려고 밤참을 싸라고 했다. 그런데 조사는 내가 치안판사를 만나러 가야 한다고 했다. 긴 토론 끝에 나는 우리가 가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도착했고, 나는 내 명함을 보냈다. 그는 소년을 보내 들어오라고 했지만, 김 조사는 그런 식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안에서 부르는 소리를 들었고, 그 소리에 문지기가 대답하자 문을 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우리가 들어가자 그는 우리를 매우 친절하게 맞아주었다. 한 시간 머물렀다. 한국에서 교회가 무엇을 의미하고, 무엇을 의미하지 않는지 그에게 말해주었다. 걸어서 몇 분밖에 안 되는 우리 마을로 돌아왔다. 일찍 저녁을 먹고 1시가 조금 지난 후 출발하여 험한 진흙 길을 건너 성유안으로 왔다.

성유안(Sung Yuan, 40리). 이곳에서 우리는 밤에 떠들썩한 소리를 들었다. 다시 주변에 많은 소년들이 모여들었고 그들은 별로 착하지 않다. 방이 너무 열려 있어서 감기에 걸릴 것 같았다. 조사가 머무는 집에서 모임을 가졌다. 남자 4명, 남자아이들 몇 명과 여인 몇 명.

12월 10일 - 일어나니 예상보다 기분이 좋았다. 밤에 따뜻해졌다. 8시 30분에 출발하여 아픈 형제를 보려고 멈췄다. 12시 30분에 도착했다. 가는 길에 비가 조금 왔다. 차가운 방에 들어서 감기에 걸렸다. 곶바란(Kot parron, 60리). 오후 5시쯤 이곳에 도착하여 지난봄에 우리가 사용했던 방에 머물렀다. 멀지 않은 다른 집에서 모임을 가졌다. 밤에 비가 많이 왔다.

12월 11일 – 9시에 곶바란을 떠났다. 섭불골(Sop pul Kol) 가는 길에 두 집을 방문했다. 섭불골은 철 밥솥을 만드는 곳이다. 이곳에서 시험을 치른 후 저녁을 먹었다. 식사 후 송곡골을 향해 출발했다.

송곡골(Song kok Kol 30리). 가는 길에 한 마을에 들러서 짧은 모임을 가졌다. 그런 다음 매우 높은 언덕을 넘어 이곳으로 왔다. 시험을 치렀는데 사람들이 배우려고 무척 열심이었지만 몹시 무지했다.

에비 여사가 양화진에 기증한 웰본 선교사 유품. 묘원 내 전시 공간인 양화진홀에 전시돼 있다.
▲에비 여사가 양화진에 기증한 웰본 선교사 유품. 묘원 내 전시 공간인 양화진홀에 전시돼 있다. ⓒ에스더재단
12월 12일 – 어젯밤에 키니네를 좀 먹었는데 감기가 별로 낫지 않았다. 정오에 이곳을 떠나기로 결정했는데 사람들이 너무 성대한 점심을 차리는 바람에 2시 전에는 떠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우리 짐을 날라줄 세 명의 짐꾼들과 함께 2시에 출발했다. 말이 짐을 버리고 언덕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산기슭에 있는 마을에서 모임을 가진 후 한 노부인을 문답했으나 그녀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 20리를 가서 어두워진 후에야 (Par)에 도착했다.

발(Par, 40리). 이곳에는 두 가정의 신자들이 있다. 전 조사가 매우 피곤해서 저녁 기도회에 올 수 없다고 했는데, 내가 모임을 시작하고 나자 그가 들어왔다.

12월 13일 - 말이 출발할 준비가 되었을 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에게 먼저 가라고 했고, 우리는 집회를 하고 시험을 치른 후 나중에 가기로 했다. 10시경 출발하여 12시가 조금 지나서 사창에 도착했다.

사창(Sai Chang, 30리).37) 아주 크고 높은 방을 얻었다. 하지만 방안에는 잡동사니가 가득했고 악취가 났다. 문종이가 너무 오래되어서 방이 어두웠다.

12월 14일 – 날이 흐리고 천둥이 쳤지만 기도회를 마친 후 남창(Nam Chang)으로 예배를 인도하러 갔다. 많은 사람들이 출석했다. 나는 처음으로 설교를 시도했다. 이곳 사역은 훨씬 더 좋은 상태에 있는 것 같다. 몇 사람에게 문답을 했지만 한 명도 합격하지 못했다 – 모두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

12월 15일 – 일찍 출발하고 싶었기 때문에 새벽 2시 15분에 깼다. 더 이상 잠을 잘 수 없었다. 7시 조금 전에 출발했다. 정오에 근래에 화재가 난 마을에 있는 깨끗한 여관에 들렀다. 길은 아주 좋았다. 110리를 와서 감리교 교회1)38)에서 멈췄다. 7시가 되어서야 그곳에 도착했고 매우 피곤하고 추웠다. 옆방에는 4명이 잤다. 방 사이에 문이 없었고 사람들이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한참 동안 깨어 있었다.

12월 16일 – 그런데 보이가 3시 15분에 와서 더 이상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오전 내내 배가 아팠다.

염미리(Yum mi di, 60리). 이곳에 12시쯤 도착했다. 5시에 아침을 먹고 6시간을 걸어왔기 때문에 2시에 점심을 먹을 때 무척 피곤하고 배가 고팠다. 이곳 사역은 놀랍도록 잘 이루어지고 있었다. 10시까지 후보자들을 심사했다.

12월 17일 - 오늘 아침에는 5시까지 잤다. 말들은 7시에 떠났다. 전 조사와 나는 모임이 끝날 때까지 있다가 언덕에서 말을 따라잡았다. 우리가 출발할 때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온종일 오락가락했다. 아직도 배가 많이 아프다. 오후와 저녁때는 무척 어지러웠다. 5시(90리) 조금 넘어서 원산 가는 길39)에 있는 여관에 도착했다. 배가 아픈 것을 제외하고는 꽤 괜찮다. 저녁을 많이 먹지 않았다.

12월 18일 – 배가 많이 나아졌다. 요리사가 3시 15분에 나를 깨워서 아침 준비를 할 시간이 되었는지 물었다. 7시 조금 전에 길을 나섰다. 새 여관이 있는 곳까지 30리를 갔다. 점심을 먹고 60리 떨어진 가난한 작은 마을로 갔다. 머물 곳을 찾을 수 없었다. 모두 손님이 꽉 차 있었다. 가슴과 근육에 한기가 돌 때까지 바깥에 서 있었다.

12월 19일 – 4시가 조금 넘어서 일어났다. 7시가 지난 후에 출발했다. 눈이 조금 내렸지만 곧 그쳤다. 3시에 이곳에 도착했다(60리). 3명을 심사했다. 다른 사람들은 집에 없었다. 오랫동안 세례받기를 원했던 나이 많은 여인을 만나지 못했다.

12월 20일 – 어젯밤에는 꽤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잠을 많이 못 잤다. 3시 15분에 마부가 와서 우리를 깨웠다. 그리고 4시 20분에 다시 왔다. 5시에 일어나서 7시에 출발했다. 다락원까지 50리40)를 왔다. <끝>

[미주]
32) 이 일기에 나오는 지명은 해독하기가 아주 어렵다. 어떤 경우에는 아서가 바른 철자를 몰랐거나 변형이 있을 수 있다.
33) 다락원, 도봉구와 의정부시 경계. 옛 지도에 도봉리 ‘상루원’, ‘누원리’가 나온다. 조선시대 경흥로는 혜화문을 지나 미아리고개를 넘고 누원(다락원)을 지나 철원으로 이어진다.
34) 서울특별시 성북구에 있었던 조선 후기 서울 성곽의 4소문 가운데 동북쪽 문(門). 혜화문이라 불리고 있다.
35) ‘동두니’는 동두천. 동두천이 옛 ‘동두내’인데, 아마 ‘내’를 ‘니’로 들은 듯하다.
36) 아서 선교사가 방문했던 평안도 배천 지역의 마을 이름.
37) 현 국도56호선에 철원군 근남면 육단리→수피령고개→다목리→사창리→화천군 명월리로 이어지는 길이 있지만, 여기에 나오는 사창리가 현재의 사창리인지는 불명확하다.
38) 1902년까지 강원도 서부 지역에 감리교회는 1900년 철원제일교회가 설립되었고, 1901년 김화 지경터교회, 새술막교회, 1901년 춘천 퇴송골에 춘천 최초의 감리교 속회가 시작되었다.
39) 『도로고』에 의하면 한양에서 원산에 이르는 경로는 한양~수유리점~누원점~서오측점~축석령~송우점~파발막~장거리~만세교~양문역~풍전역~가오개령~장림천~김화~금성~창도역~개오현~송포강~신안역~회양~청령~고산역~용지원~남산역~안유~원산으로 이어졌다.
40) 다락원까지 50리 거리이면 이날 출발 지점은 포천군 송우리로 추정되며, 당시 송우점은 경흥로 경로에서 사상인들이 활동하던 주요 근거지 중 한 곳이었다.

글=프리실라 웰본 에비
엮은이=김현수 박사
미주 추가=리진만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