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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펜젤러의 이러한 새로운 교육은 조선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의 전기를 쓴 그리피스는 이러한 점을 아래와 같이 지적하였다. “아펜젤러가 주축이… 1897년 배재를 입학하여 아펜젤러에게서 직접 교육을 받은 윤성렬 목사는 배재학당의 당훈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펜젤러 당장(堂長)은 1886년 … 「기도의 신학」이란 저서의 제목은 총신대학 학장으로 계셨던 김희보 목사님의 조언을 심사숙고하여 사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기도의 신학」이란 … 아펜젤러가 학교 교육에 심혈을 기울인 것은 바로 ‘이 학교를 조선 복음화(福音化)의 원동력(原動力)’으로 삼자는 데 있었다. 그의 교육 목표는 단순…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학교의 규칙(規則)은 다음과 같다. 이 학칙은 당시 조선 정부에서도 갖지 못했던 학칙을 아펜젤러가 처음으로 만들어 … 5. 주기도문의 맨 마지막이고 송영의 끝부분에 붙은 ‘아멘’이란 어휘는?(마 6:13) 주기도문 송영의 괄호 안에 든 간구에서, 마지막에 기록된 ‘아멘’… 아펜젤러는 구입한 한옥의 두 방을 헐고 합쳐서 교실로 사용하면서 이겸라, 고영필 두 청년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그들에게서 조선어를 배우기 시작했… 넷째로 그는 출판가로서 삼문출판소를 세워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서적을 출판하고, 종로에 서점을 세워 서적을 판매했다. “1894년 3월 청일전쟁 … 아펜젤러는 대단한 활동가였다. 그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그의 동료들은 그가 사십 대가 되었을 때 이미 늙은 사람처럼 보였다고 한다. 27살에 조… 다음은 데모하는 학생들의 피신에 관여하지 말라는 알렌의 요청에 대한 아펜젤러의 답장이다. 앞서 알렌은 아펜젤러가 데모하는 학생들을 보호하려다… 아펜젤러는 조건 없이 비폭력적이거나 무저항주의자는 아니었다. 필요에 따라 그는 옳고 그른 일을 가리고 저항하는 일을 사양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 아펜젤러 당장(堂長)은 덮어놓고 좋다거나 요령(要領)없이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옳고 그른 것을 가릴 때는 엄격하고 철저했던 것이다. 이익채는 ‘배… 아펜젤러는 덕(德)으로서 사람을 지도(指導)하는 분이었다. 즉 이덕복인(以德服人)하는 사람이었다. 당시 아펜젤러 당장을 모시던 초병이 있는데, 그의… 2. 주기도문과 함께 사용되고 있는 송영은 성경에서 그 유형을 찾을 수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주기도문과 함께 사용되고 있는 송영은 성경에… 아펜젤러는 선교 초기부터 열정과 헌신으로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선교사였다. 그는 아침 6시에 한국어 공부를 시작하였다. … 아펜젤러가 요한 웨슬리의 삶을 따르기로 한 것은 1879년 4월 20일경으로, 랭캐스터 제일 감리교회에 스미스(H. C. Smith) 목사에 의해서였다. 이때부터 그… 아펜젤러의 영적(靈的) 성장에 일대 전환점을 초래한 것은 그의 회심 체험과 감리교회로의 전환 사건이었다. 기독교 교리에 대한 지성적인 이해와 인… (4) 두아디라 교회를 향해서 주신 말씀은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 독신인 언더우드는 그날 저녁 서울로 들어가 알렌이 마련한 정동 선교부에 도착하였다. 아펜젤러는 서울에 못 들어가더라도 인천에 임시 거처를 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