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펜젤러는 선교 초기부터 열정과 헌신으로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선교사였다. 그는 아침 6시에 한국어 공부를 시작하였다. … 아펜젤러가 요한 웨슬리의 삶을 따르기로 한 것은 1879년 4월 20일경으로, 랭캐스터 제일 감리교회에 스미스(H. C. Smith) 목사에 의해서였다. 이때부터 그… 아펜젤러의 영적(靈的) 성장에 일대 전환점을 초래한 것은 그의 회심 체험과 감리교회로의 전환 사건이었다. 기독교 교리에 대한 지성적인 이해와 인… (4) 두아디라 교회를 향해서 주신 말씀은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 독신인 언더우드는 그날 저녁 서울로 들어가 알렌이 마련한 정동 선교부에 도착하였다. 아펜젤러는 서울에 못 들어가더라도 인천에 임시 거처를 확보… 아펜젤러 부부는 1885년 3월 23일 요코하마를 출발하여 고베를 거쳐 3월 28일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배를 갈아타고 3월 31일 부산을 향해 출발한… 3.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와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의 간구에 대한 우리의 실행, 책임, 정신에 대한 태도 1)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의해 … 1885년 1월 15일, 미선교국의 대변인 격인 통신 서기관인 리드(J. M. Reid)가 조선으로 떠나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는 아펜젤러 내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한경수 감독은 우리 민족은 겨레의 은인인 아펜젤러를 기려야 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교회에서 발행되는 선교회보에 다음과 같은 아펜젤러의 글을 인… 주기도문의 여섯째 청원의 후반절은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이다. 이 후반절을 일곱째 청원, 곧 별개의 간구로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 헨리 게하르트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는 조선에 온 문명의 개척자로, 세계 감리교회 사상 불후의 이름을 남긴 선교사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 감리교단 파송기에 따르면 이병주 전도사는 1924~1925년 원주지방에 소속된 단양교회, 1926~1927년 충주 목계교회에서 담임 목회자로 있었지만, 충주 지역 … 총독부 관보 포교 규칙에 의해 1915년 12월 말에 신고된 원주지방 교회는 4개 교회였고, 1916년 9월에 2개 교회가 새로이 허가를 받았는데, 그 현황은 다음… 3.1운동 당시 기독교계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는 이들은 원주읍 교회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지 못한 주된 이유를 북감리파 선교부의 내보(內報)와 견… 지난 11월 17일은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신명을 바치신 애국선열들을 추모하고, 그 숭고한 위훈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제82회 순국선열의 날’이었… 둘째, ‘시험’의 다른 적용은 인간을 어떠한 욕심에 이끌리게 하여 악한 죄에 빠지도록 유혹하는 데 있다. 그래서 죄의 유혹으로 ‘꾀인다’ ‘악을 … 언더우드 선교사는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에 조선의 인천 제물포에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와 같이 도착하였다. 그는 안수를 받은 목사로서 최초로 … 아들 스크랜턴이 조선에 선교사가 되기로 결단한 것은 그의 어머니인 메리 스크랜턴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녀는 이번 기회가 소녀 시절부터 꿈꾸어왔… 1884년 12월에 있었던 갑신정변의 여파로 보수파가 주도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1885년 봄 부활절에 미감리교회의 아펜젤러 내외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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