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매서인들, 미국 선교사 입국 전까지 1만 권 이상 한글 복음서 반포
선교사 오기 전 서간도·의주·평양·소래·서울 등지 많은 공동체 만들어져

평양·원산·송도·서울·제물포 등의 부흥이 전국 확산 이후 1907년 대부흥운동
1909년 한국 기독교 신자 15만 명, 같은 해 ‘백만명구령운동’ 추진해 성공

Ⅳ. 초기 매서인들이 활동하던 시대적 배경

초기 매서인 모습
▲초기 매서인 모습 ⓒGCAH Digital Gallary
한국 개신교의 여명기인 1882년 한글복음서가 출간된 해 3월에 로스는 일단 한글성경의 반포가 가능한 만주 서간도의 한인촌을 대상으로 전도하기로 하고, 김청송을 최초로 완성된 한글 성경을 가진 전도자 겸 ‘매서인’으로 삼았다.

1882년 누가·요한 두 복음서의 번역과 인쇄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도움에 의한 것이었다. 그해 6월 로스로부터 누가·요한복음 각각 1,000권씩을 수령한 일본 스코틀랜드성서공회(NBSS) 총무 톰슨 목사는, 일본인 신자로 ‘매서인’을 삼아 조선의 개항장인 부산과 원산의 일본인 거류지를 거점으로 성경보급소를 개설할 계획을 세우고, 나가사카(長坂毅)를 파송했다. 그는 일본 영사를 통해 조선 관리를 만났으며, 부산과 원산에서 성공적인 성경반포와 탐사를 마치고 그해 8월에 돌아가며 부산의 사업을 코토(Koto)에게 맡겼다.

1882년 4월경 로스로부터 세례를 받은 서상륜이 6개월간 중국 봉천(현 심양)에서 성경사업을 돕다가 의주 신자들과 구도자들이 끊임없이 성경을 요구해 오게 되자, 로스는 그해 10월 대영성서공회(BFBS) 한국 최초의 ‘매서인’으로 서상륜을 파송한다. 조선인 매서인이 파송되기 4개월 전 일본인 매서인은 일본 군함을 타고 외국 선교사들이 이 땅에 입국하기 이전에 일본인에 의해 성경이 전파되고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기독교 여명기의 아이러니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1. 초기 선교 사역과 매서인 사역

오늘의 한국 개신교회가 형성되는 데 초기 영향을 끼친 선교활동은 1870년대 중반 만주에서 선교사 로스(John Ross)와 맥킨타이어(John MacIntyre)가 봉천 등지에서 조선인들을 만나 기독교를 전하기 시작하면서 비롯됐다. 이들의 전도를 받은 이응찬, 백홍준, 김청송, 서상륜 등 조선인들은 선교사들과 함께 『예수성교누가복음전서』와 『예수성교요안내복음전서』를 봉천에서 간행했다. 이 개종자들은 한글 성경을 간도와 한만국경지역 뿐만 아니라, 목숨을 걸고 국내에도 반입하여 서울까지 가지고 가서 전파했다. 이들 조선인 매서인들은 조선이 개항하여 미국 선교사들이 입국하기 전까지 1만 권 이상의 한글 복음서를 반포하고 전도했다. 미국 선교사들의 입국 이전에 서간도, 의주, 평양, 소래, 서울 등지에 많은 공동체가 만들어진 것이다.

미국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하기 이전 일본에서도 1883년 이수정이 최초로 세례를 받은 이후 조선인 유학생 사이에서 다수의 개종자가 생기고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다. 미국성서공회의 지원으로 이수정이 번역에 참여해 『신약마가복음서언해』가 1885년 2월에 출간되어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그해 부활절에 조선에 입국할 때 이 복음서를 갖고 오게 되었다.

1897년 12월 8일 서울교회에서 개최된 남감리회한국선교회 제1회 연회보고를 보면, 당시 선교사는 서울에 3명, 개성에 1명인 반면, 매서인은 서울에 1명, 개성에 1명이 선교사를 도와 토착전도인으로서 복음을 수용한 토착구도자들에게 열심히 전도했음을 보여준다. 그해 남감리회의 선교구역이 서울과 경기 북부를 넘어 강원도까지 확산되었다. 남감리회 선교부에서는 윤성근을 김화로 보내 전도하게 하였고, BFBS의 파송을 받은 매서인 나봉식과 정동열이 춘천 지방에 파송되어 강원도 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6)

청일전쟁 이후 1904년 다시 한반도를 전장화시킨 러일전쟁 기간 우리 선조들은 먹을 것과 머리 둘 곳을 찾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매서인들은 그 와중에서도 최선을 다해 사역을 했다. 전쟁이 끝난 후 우리 민족은 큰 각성을 하게 되고, 이전까지 기독교에 대해 경멸하던 식자 계층에도 상당한 종교적 각성이 일어났으며, 이로 인한 성경의 수요는 점점 증가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06년 각 선교회에서는 선교거점마다 특별집회를 갖고 영적 분위기에 불을 붙인다. 평양, 원산, 송도, 서울, 제물포의 부흥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는데, 이 부흥운동은 계속되어 1907년도 대부흥운동 후 1909년 한국 기독교 신자는 총 15만 명에 이른다. 각 선교회와 성서공회는 이러한 마음을 움직여 신자 수를 100만 명에 이르게 하자는 ‘백만명구령운동’을 추진한다. 1909년 가을에 시작한 이 전도운동은 한국교인들의 적극적인 호응으로 크게 성공했다.

년도 별 성경반포량 매서인 및 선교사 인원
[표 2]는 대영성서공회에서 집계한 성경 반포량, 매서인 수와 대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선교사(가족포함) 수를 볼 수 있다. 이후 1912년 남감리회연회보고에 나타난 구역별 주요 통계중 매서인 현황을 보면 춘천 1명, 원산 1명 개성북 1명, 개성동 1명, 철원 1명, 기타 31명으로 총계 36명으로 나타났다.7)

1913년도 BFBS의 연례보고서를 보면 전 세계에서 활동하는 매서인 중 중국이 380명으로 가장 많고 다음으로 대한국 182명에 이어 인도 160명으로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성경 판매량 역시 중국에서 2,010,434권, 대한국 311,278권, 인도 310,364권으로, 이는 전 세계가 놀랄만한 ‘백만명구령운동’의 영향이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고무적인 현상이었다.

또한 당시 교인 총수와 헌금 부분에서 전국 남감리교회 1위를 기록한 ‘종교교회’가 1917~1918년 연회에 제출한 종교구역 ‘매서인’ 통계 상황을 살펴보면, 1917년 1명, 1918년 1명으로 나타나 그 시기에 개교회에서도 ‘매서인’이 활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2. 매서인의 채용 조건

대영성서공회에서 ‘매서인(Colporteur)’을 채용할 때의 조건은 “매서인(권서)은 일반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 건강하고 중년의 나이에 이른 사람 중에서, 선교사나 현지 교회가 추천함으로 선발되었다”고 한다.8)

정리하자면 ‘매서인’이 되려고 하는 사람은:
첫째, 강건한 신체와 훌륭한 성품 및 영혼을 구하고자 하는 정열
둘째, 주위에서 칭찬받고 잘 알려져 있으며, 신앙 면에서 흠이 없는 사람
셋째, 기독교적인 인격과 맡겨진 일의 능력에 따른 담당 목사나 선교사의 추천의 과정을 거쳐야 했다.

이에 더해,
1) 신앙심이 깊고 신뢰할 수 있는 성품의 소유자가 되어야 했으며
2) 효과적인 방법으로 성경을 전파하는 능력의 소유자이고
3) 해당 지역의 기독교 지도자이며 영적 지도력과 지적 능력을 갖춘 자이고
4) 한문, 한글에 능통하고 성경에 관한 해박한 지식의 소유자가 ‘매서인’ 에 채용될 수 있었다. <계속>

[미주]
6) “Statistics of Korea Mission of the M. E. Church, South, for Year ending Dec. 8th, 1897" MAMK, 1897
7) MAKMS, 1912
8) 이만열, 『동방학지』, 〈권서에 관한 연구〉, 100p.

리진만 우간다·인도네시아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