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희 목사
▲이범희 목사
1950년 10월 1일 서부의 국군1사단과 동부의 국군3사단이 3.8선을 돌파했다. 맥아더 장군은 이날 대만에 직접 가서 장개석(장제스)을 만난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이날 건국 1주년 행사를 하여 항미원조를 강조한다. 미국에 대항하고 조선을 돕자는 중공군의 구호이다. 모택동(마오쩌둥)은 자신의 화려한 데뷔를 위해서 미국과의 일전을 선포한다. 주은래(저우언라이)는 전쟁이 나면 미 공군이 만주와 상해를 폭격할 것이라고 반대한다. 중공은 공군력이 없었다. 결국 모택동의 의지대로 전쟁 참전이 결정되었다.

어디서 미국과 싸울 것인가. 베트남, 대만, 조선이었다. 그들에겐 어차피 남의 나라이다. 결국 지리적으로 가까운 조선을 미국과의 전쟁터로 결정했다. 소련은 미국과 직접 싸우지 않고 물자를 지원하기로 했다. 스탈린은 미국과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어떻게 미국과 싸울 것인가. 1950년 10월 19일 이승만 대통령은 10만 명이 운집한 평양에서 명연설의 수복기념식을 했다. 그러나 이날 중공군은 만주에 60만 명을 집결시키고 사상, 정치, 전술 교육을 마쳤다. 정치적으로는 “미국이 조선을 넘어 중국을 침략해 왔다. ‘순망치한’ 중국을 지키기 위해서 조선을 돕자”, 사상적으로는 “항미원조. 미국에 대항해서 조선을 돕자”, 전술적으로는 “낮에 숨고 밤에 공격하라. 폭풍처럼 공격하고 바람처럼 사라져라. 꽹과리로 공격하고 징 소리에 이동하라. 게릴라전으로 소대가 기습공격하고 피리로 중대가 공격한다”는 것이다.

미군이 지금까지 상대한 적치고 너무나도 낯선 부대였다. 미군의 공군과 포병의 대포가 아무리 포격을 해도 땅속에 숨은 중공군은 타격을 받지 않았다. 1950년 10월 24일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었다. 신속하게 산속으로 숨었다. 미군 정찰기가 발견하지 못했고, 그날 밤에 중공군이 미군을 기습공격 했다. 그러나 미군은 중공군의 참전을 믿지 않았다. 중공군을 포로로 잡았지만 중국계 조선 인민군이라고 생각했다.

중공군은 선전포고 전에 이미 작전을 개시했다. 중공군의 전선 사령관 팽덕회가 강계 산속에서 김일성을 만난다. 13병단의 30만 명의 대부대를 이끌고 서부전선의 미8군과 국군1사단을 포위해 들어왔다.

1950년 10월 29일 중공군은 연합군을 기습공격하고 11월 2일에 방송으로 선전포고를 했다. 국군6사단 7연대는 영월 지역에서 광업소 차량 100대를 징발하여 빠른 기동력으로 소위 압록강 물 먼저 뜨기 작전으로 너무 깊숙이 적의 포위망에 갇혔다. 미군 제8기병연대는 이미 중공군의 기습공격으로 처절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특히 3대대는 다부동전선 왜관 303고지에서 통신소대 26명이 적에게 포로가 되어 전선줄로 포박되어 전원 사살된 부대였다. 이 부대가 다시 운산 전투에서 800명 전투부대원 중 600명이 전사했다.

미 제1기병사단 게이 장군은 미 제5기병대를 투입하고, 국군1사단 백 장군은 12연대 평양 축구부 수색조를 투입해서 구출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전선에 있던 종군기자는 미8연대 전원이 전멸했다고 외신을 때렸다. 다급해진 백 장군은 밀번 미1군단장과 상의해서 후퇴를 결정했다. 미 제10고사포 단장 헤릭 대령이 명령을 받고 1만 3천 발의 포탄을 적의 공격로로 집중 강타하여 아군의 후퇴를 지원했다. 서부전선은 이렇게 무너졌다.

동부전선의 중공군 9병단장 송수륜은 세계 최강 미 제1해병사단을 전멸시킨다는 자신감으로 흥분되어 있었다. 1950년 11월 26일 이미 장진호에 중공군 12만 명을 매복시키고 미 해병 1만 5천 명을 겹겹이 에워싸고 유령처럼 나타나 폭풍처럼 공격하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미 해병은 2개의 적과 싸운다. 때 없이 쉼 없이 나타나는 적과 ‘한국의 지붕’ 개마고원의 영하 30도의 추위는 미 해병전투 역사상 가장 큰 고통이었다.

중공군은 고지에 있는 미 해병의 50구경 기관총을 향해 수천 명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죽고, 죽고, 또 죽어도 계속 유령처럼 달려왔다. 생명은 이미 무가치했다. 이것이 인해전술이다. 유엔사령부는 미 해병의 전멸을 염려해서 공중으로의 탈출을 권고했다.

그러나 해병 제1사단장은 경계병력 2개 대대를 포기할 수 없다며 미 해병의 명예를 위하여 후퇴가 아닌 다른 방향으로의 공격을 명령했다. 그리고 전사자와 부상자를 다 챙기고 14일간 전투 끝에 42km의 포위망을 뚫고 흥남부두에 도착했다. 이 전투로 미 해병은 전사, 동상 등으로 6천 명의 손실을 보았다. 중공군은 5만 8천 명의 손실과 부상자가 생겼으나, 이들을 후송하지 않아 산속에서 모두 얼어 죽고 9병단 전체가 무너지고 말았다.

트루먼은 이 소식을 듣고 맥아더가 결정하면 핵을 사용하겠다고 선포한다. 세계가 놀라고 영국 수상 애틀리는 급히 워싱턴으로 날아왔다. 트루먼은 공산당에게 져서는 절대 안 된다고 소리쳤다. 이 전쟁은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 선언한다.

이범희 목사(㈔한국보훈선교단 이사장, 6.25역사기억연대 역사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