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1권 판매하기까지 만나는 사람은 평균 15명
순사와 헌병의 위협·미행·투옥·벌금 등 고난 뒤따라

매서인
▲1910년 예수교서회의 매서인 모습.

3. 원주지방 선교 발전에 공헌한 매서인들

1) 장춘명(張春明) 목사: 여주교회 설립

장춘명 목사는 1856년 4월 7일 경기도 음죽군 설성면 송계리에서 출생하였고, 여주군 삼군리에서 성장하였다. 장 목사는 선교사 시란돈 대부인, 시란돈 목사와 함께 1902년 관속(官屬) 등 75인이 회개하고 여주교회를 창립하였다. 장 씨는 어려서부터 의협하고 호담하여 지방토호들의 행패를 많이 제재하였다. 그는 1889년에 기독교인이 된 후 의병활동을 하다가 1899년 3월 덕들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매서인이 되어 광주, 이천, 용인, 양지, 양평, 여주, 원주, 충주, 제천, 음성, 죽산 등지를 왕래하며 전도하여 83처에 교회를 설립하였고, 3천여 신도를 얻었다. 여주보통공립학교가 개교하기 전 장 목사는 여흥학교를 설립하였고, 가남면에 개신학교, 점동면에 소성학교 등을 설립했다. 장춘명 목사는 1911년에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집사목사가 되었고 1916년에 장로목사가 되었다.

2) 엄응삼(嚴應三) 전도사

엄응삼 전도사는 1907년부터 1909년까지 원주선교부가 북장로교회로 교계예양 합의에 의해 이관할 때, 선교부 관리자 아서 웰본, 클라크 선교사를 도와 원주선교부 부지 2만여 평(20에이커)을 사서 선교회 용지로 충당하는 일에 조사 김영옥과 지방 영수로서 크게 기여했다. 1909년부터 1912년까지 대영성서공회에서 ‘매서인’ 활동을 하였는데 사역지는 경북이었다. 경북에서 강원도 문막으로 이주를 한 이유가 무엇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고향이 원주이고 매서인 이계삼과 함께 매서활동을 한 것이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북장로교단에 소속되어 경북 안동읍교회에서 조사 사역을 하던 엄응삼 장로는 1919년 말 문막으로 이사를 왔다. 그는 미국에서 돌아온 백근종과 함께 문막교회를 증축하고 사택을 건축하며 3.1운동 이후 쇠퇴해 가는 문막교회를 부흥시켰다.

또한 <조선총독부 관보> 포교규칙에 의하면, 엄응삼 전도사는 1920년 2월 16일에 문막교회(강원도 원주군 건등면 문막리)의 포교자로 보고되었으며, 엄 전도사의 문막교회에서 서리 담임자 역할은 1922년 9월 연회 때까지 시무한 것으로 나타난다.

1920년에는 문막교회를 겸임하고 원주읍교회를 담임하던 조윤여 전도사가 일제에 구속되어, 이 기간에는 원주병원 앤더슨(Dr. Anderson) 의사가 원주읍교회와 문막교회를 돌보았다. 모리스 감리사는 1919~1920년 감리교연차총회 보고에서 “지방회 모든 사역자들은 그들의 직무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우리 가슴에는 희망이 있다”고 했으며, 문막교회는 이 어려운 기간에 성도가 2배로 늘었다고 보고했다.

매서인
▲매서인(그림)들은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반포했다.
3) 이계삼(李桂三) 전도사: 문막교회 설립

이계삼 권사가 대영성서공회에서 매서인으로 활동을 하던 시기는 1909년부터 1912년 봄까지 앞에 소개한 엄응삼 전도사와 같은 기간이며, 순행하던 지역을 당시 자료를 참고해 보면 원주를 중심으로 문막, 여주, 횡성, 평창, 영월, 제천, 단양, 충주 지역으로 사료된다. 더구나 1910년대의 강원도, 특별히 원주 문막 지역은 대한국에서 가장 오지 중의 한 곳이었다. 높은 산도 많았고 강도 깊어 통행이 그리 자유롭지가 않았다. 그 시대의 선교 활동을 보면 현재 문막읍이 속했던 원주군은 춘천, 김화, 지금은 북한 땅인 평강, 이천보다도 한참 늦게 선교사가 진출했다. 현재 강원도에 있는 도시 중에서 외국인 선교사들이 찾은 도시 가운데 원주에 선교사들이 가장 늦게 파송되었다.

당시 강원도에서 활동하던 매서인의 숫자는 19명9)에 불과해 선교 거점별로 3~4명씩 활동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매서인 이계삼 역시 외국인 선교사들이 들어가지 못한 먼 지방까지 여행을 하고 성경책을 판매하며 복음을 전했다.

성서공회에서 분석한 매서인이 성경 1권을 판매하기까지 만나는 사람 수인 평균 15명을 적용해 보면 매서인 이계삼이 판매한 복음서 2,255권은 무려 33,825명의 이방인들 및 신자들에게 말씀을 전한 것이다.

4) 양익환(梁翊煥) 목사: 권서시찰, 권서감독

1913년도 대영성서공회 연례보고서에 보면 대영성서공회에서 1911년부터 1937년까지 근무한 양익환 목사는 ‘쌀로부터 얻은 구원’이라는 제목의 글에 그가 1912년 4월에 권서시찰로서 북감리교회 원주 구역을 ‘매서인’들과 순행 후 기고한 글이 있다. 이러한 글을 통해 권서시찰과 함께 원주 구역을 함께 순행하는 ‘매서인’들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는 것 또한 의미 있는 일이다.

양익환은 매서인들을 방문하여 일하는 방법을 제시하거나, 그들을 격려하고 그들의 신앙생활을 돕는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권서시찰’이었다. 그 시기 매서인들은 계속하여 사경회나 성경 공부반에 참석하여 성경 지식을 쌓고 특별히 마련된 교육을 통해 판매 방법을 훈련받았다. BFBS 한국총무 밀러는 부총무 베시(F. G. Vessey)와 홉즈(Hobbs)로 하여금 전국에서 활동하는 매서인들을 일일이 방문하고 격려하고 교육하도록 했다. 한국인 권서시찰로 활약했던 분들은 위의 글을 쓴 양익환과 송순명, 이흥주, 이 세 사람이었는데 양익환 씨가 강원도를 담당했던 것 같다. 권서시찰들은 매서인들과 함께 성경을 판매하고 그 판매법을 지도한 ‘전문 매서인’일 뿐 아니라 각지에서 복음집회를 열고 개종자를 만들었던 부흥사였다.

특히 양익환은 1911년부터 1937년까지 ‘권서시찰’로 활동했고 그 후에는 ‘권서감독’으로 활약했던 분으로 대한국 일제하의 교회사에서 지대한 역할을 담당했던 분이다. 그러나 1940년 10월에는 일본이 미국에 대한 전쟁의사를 표면화한 후 재한주미영사 마쉬는 미국인의 완전 철수를 명령했다. 이러한 일본의 야욕에 의해 1940년 11월 7일 양익환은 구속되어 고문을 받다가 일제 총독부가 원하는 순수 ‘조선성서공회’ 설립 의사를 확인하고 11월 29일 풀려날 수 있었다.

강원도에 교회를 설립한 매서인들

4. 매서인들의 복음 전도 사역의 고난

‘조선복음주의개신교선교회연합공의회’를 대표한 휴 밀러 회장(Hugh Miller, Chairman)이 1919년 9월 29일 사이토 총독에게 ‘종교적 자유 청원서(An Appeal for Religious Freedom in Korea)’를 제출했다. 이 청원서는 공의회에서 사이토 신임총독의 종교 활동에 대한 시정 개혁 계획을 듣고, 이전에 향유하던 종교와 교육의 자유를 제한하고, 대한인에 대한 부당한 차별, 억압과 가혹한 압제의 수단들을 동원한 데 대한 항의서였다. 또한 새로 부임한 사이토 총독에게 진정한 종교와 교육의 자유가 보장되려면 가장 긴급하고 필요한 개혁이 무엇인지 대한인을 대변해 청원한 것이다.

이 청원서는 ‘제1항. 전도 사업에 관한 우리의 정중한 요청’, ‘제2항. 의료 사업에 관한 요청’, ‘제3항. 기독교 문서에 관한 요청’, ‘제4항. 교육 사업에 관한 요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3항 3절에는 권서 활동에 대한 사역을 방해하지 말라는 다음과 같은 제목의 청원 내용이 있다. 3항에 나와 있는 매서인에 관한 사항을 살펴보자.

“3항 3절: 지방 관헌은 성경, 소책자, 다른 기독교 문서를 판매하는 권서와 다른 사람들의 자유로운 사역을 방해하지 말 것.

권서는 순사와 헌병의 손에 함부로 취급을 받아 왔습니다. 이 관헌은 우리 사역에 있어서 결정적인 방해물입니다. 그들의 권서를 다루는 거만한 방법과 책 구매자에 대하여 책을 산 이유나 다른 질문을 캐묻는 성가신 방법은 그들을 위협하는 인상을 줍니다. 사람들은 순사와 헌병을 두려워하고, 많은 경우에 그런 질문을 당하기보다는 차라리 책을 사지 않습니다.

권서는 자주 사복형사의 미행을 당하고, 권서가 나타났다고 알려지면 항상 금방 그렇게 되지만, 권서는 사역에 방해를 받습니다. 기독교나 종교적 용어를 모르는 자에 의해서 그들의 진술이 언제 오해를 받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권서들이 이 방법에 의해서 투옥되었고 벌금을 물었습니다. 투옥되지 않고 경찰 조사만 받아도 가벼운 문제가 아니며, 사람들은 그것을 두려워합니다.

순사와 헌병의 태도는 거의 예외 없이 기독교에 반대하는 자의 태도입니다. 순사와 헌병은 그들의 영향이 미치는 범위 안에서 헌법이 보장하는 종교적 자유의 혜택을 파기한다고 말해도 지나친 것이 아닙니다.”10)

5. 대한성서공회 매서인(권서) 관련 연혁

1882. 10. 6. 서상륜이 영국성서공회의 한국 최초 권서로 500권 단편과 기독교 관계 소책자를 가지고 의주로 떠나다.

1883. 6. 나가사카가 스코틀랜드성서공회 일본지부의 촉탁으로 부산에서 한글 성경과 일본어 성경 등을 반포하다.

1883. 10. 부산에 스코틀랜드성서공회 보급소를 설치하고 일본인 권서 스가노가 경남, 대구지방까지 활동하다.

1884. 4. 스코틀랜드성서공회 일본지부의 총무 톰슨이 스가노 등 일본인 신자와 함께 입국하여 부산 근교에 보급소를 설치하고 권서활동을 독려하다.

1886. 7. 스코틀랜드성서공회 일본지부 총무 톰슨이 권서 세이노와 함께 입국하고, 세이노는 제물포와 서울에서 권서로 활동하다.

1893. 5. 8. 서울에 영국성서공회 성경보급소를 설치하고 중국인 류치화, 왕영상이 활동하다.

1895. 5. 피터즈가 미국성서공회의 한국 최초 권서 겸 부총무로 활동하다.

1898. 7. 피터즈가 영국성서공회 한국지부 권서사업담당 부총무로 활동하다.

1913. 홉즈가 영국성서공회 한국지부의 부총무로 활동하다. 후커가 미국성서공회 권서담당 부총무로 1914년까지 활동하다.

1915. 10. 서울에서 권서총회를 개최하여 172명이 참석하다.

1958. 7. 14. 제1회 권서수양회를 실시하다.

1972. 5 권서제도를 폐지하고, 자급 권서제도로 전환하다.

2020년 현재 ‘문서선교사’ 제도를 시행하고 있음.

※위 연혁은 대한성서공회 홈페이지 대한성서공회연혁에서 발췌함.

대한성서공회 배포 현황

대한성서공회는 2021년 한 해 동안 국내에 330,830부의 성경을 보급하였으며, 해외 100개 나라에 141개의 언어로 총 3,233,008부의 성경을 제작하여 보급하였다. <계속>

[미주]
9) 1909년 대영성서공회 연례보고서에 보면 강원도에서 활동하던 ‘매서인’은 총 19명이다. 보고서에 실린 대로 이름을 소개하면 김인수, 박치순, 안응삼, 이계삼, 신재오, 이익환, 장한익, 조웅구, 구찬회, 이식완, 장학수, 김동수, 김옥영, 남인상, 최영식, 박동호, 엄영집, 김인식, 김영식인데, 김인식 씨만이 교단이 미남감리교이고 M. B. Stokes, C. T. Collyer 감독 아래 활동했다는 기록이 있고 나머지 분들의 교단이나 그 당시 감독은 적혀있지 않다. 이 중 4년 이상 활동한 분은 이계삼, 김목영, 남인상, 김인식 씨 4명에 불과하다.
10) 대한성서공회사 자료집 제3권 P.742.

리진만 선교사
▲리진만 선교사
리진만 우간다·인도네시아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