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의 주체는 ‘하나님’, 성령 임하면 개인 및 공동체적 영적 각성 일어나고,
사회·문화적 변혁이 이어져 교회가 사회·민족을 선도하는 구심점으로 거듭나부흥은 하나님을 향한 죄인들의 각성과 회심 낳는 그리스도인의 첫사랑의 회복
교회 집회나 성장은 수단이나 결과일 수 있지만 부흥과 동일시할 수는 없어
세계 교회사에 나타난 부흥의 역사를 고찰하기 전 먼저 부흥이 무엇인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흥이 무엇인가에 대해 다양한 사람이 여러 방면으로 부흥을 정의하고 있지만, 아마도 가장 선명하고 훌륭한 정의는 세계적인 청교도 개혁신학자 거두 제임스 패커(James I. Packer) 박사의 부흥에 대한 정의일 것입니다. 그의 책 ‘성령과의 동행’(Keep in Steps with the Spirit)에서 “부흥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교회를 소생시키는 일”이며, “하나님의 진노를 하나님의 교회에서 멀리 옮기시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마음에 찾아오시는 일”이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은혜의 주권을 드러내심”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패커 박사는 부흥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임하시면 자신의 온갖 죄악을 토로하는 개인 및 공동체적 영적 각성이 강하게 일어나고, 그 후 사회 및 문화적 변혁이 이어져 교회가 사회와 민족을 선도하는 구심점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것이 참된 부흥이며, 그 전형적인 모형은 사도행전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성령의 비상한 역사, 베드로의 설교를 통한 말씀의 깨달음과 죄에 대한 철저한 회개, 그리고 은혜를 받은 공동체의 변화가 그 특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후에 복음이 놀랍게 전파되고 교회가 흥왕(興旺)하는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세계적인 신약학자 부르스(F. F. Bruce)가 표현한 것처럼 오순절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은 불꽃처럼 로마 제국 전역에 확산되었을 뿐 아니라 유럽 복음화에 기여했다고 했습니다. 기독교의 근간이 바로 성령님께서 부어 주신 부흥의 역사에 기인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부흥을 뜻하는 ‘Revival(리바이벌)’은 보통 침체되어 있는 삶과 신앙을 회복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조셉 켐프(Joseph W. Kemp)는 “엄밀히 말해서 부흥이란 이미 존재하고 있기는 하지만 침체된 상태에 있는 것에 다시금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것을 뜻한다”고 정의하였습니다.
기독교에서 부흥이라고 할 때, 영적으로 침체되어 있는 신앙의 상태를 회복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윌리엄 스프레그는 “종교가 비교적 침체된 상태를 벗어나 활력을 되찾아 갈 때, 헌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의무에 더욱 충실해질 때, 그리고 교회가 새로운 경건성으로 능력을 더해 갈 때 우리는 그것을 주저하지 않고 ‘부흥’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침체된 상태에서의 회복을 부흥과 연관시키려는 노력은 찰스 피니에게도 그대로 찾을 수 있습니다.
19세기 미국 부흥 운동의 주역 찰스 피니는 그의 유명한 저서 ‘부흥론(Lectures on Revival)’에서 “부흥은 하나님을 향한 죄인들의 각성과 회심을 낳는 그리스도인의 첫사랑의 회복이다”라고 정의하였습니다. 피니는 “부흥이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새로이 시작하는 것에 불과하다. 회심한 죄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 첫 단계는 마음을 찢고 깊이 회개하는 것이며, 이어서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 앞에 흙으로 돌아감으로써 죄를 용서받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죄에 대한 회개를 통한 영적인 신앙의 회복을 부흥이라고 할 때 다음 네 가지 사실을 전제합니다. 후에도 언급하겠지만, 본질적 의미에서의 부흥에 대한 피니의 정의는 놀라운 것이지만 인위적 부흥에 대한 노력은 두고두고 미국 교회사가들에게는 논쟁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부흥은 일차적으로 신자의 부흥이라는 사실입니다. 부흥이 회개와 깊은 연계성을 지니는 것은 새로운 신자보다는 이미 믿는 신자들에게 일차적으로 그것이 적용됨을 함의합니다. 모건(G. J. Morgan)이 “엄밀히 말해서 부흥이란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의 삶이 아니라 성령의 내주하심을 통해 신자들의 삶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것”이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부흥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항상 기성 신자들의 영적 각성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1905년 복음주의연합공의회가 결성된 후 장로교, 감리교 선교사들이 새로운 신자의 영입보다 기성 신자의 각성이 먼저 선행되어져야 한다고 본 것은 정확한 진단이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둘째, 교회에서 하는 어떤 집회나 교회의 성장이 부흥의 수단이나 결과일 수 있지만, 부흥과 동일시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성경과 기독교 역사가 보여주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성장이 부흥의 결과이기는 하지만 결코 성장이 부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부흥은 교회가 성장하거나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드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물론 부흥이 일어나 사람들이 영적인 깊은 잠에서 깨어나면 전도가 활성화되고 교회가 성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부흥 운동이 일어나지 않아도 교회가 성장할 수 있기 때문에 교회 성장을 부흥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일각에서 부흥회나 전도집회를 부흥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는 것은 부흥에 대한 바른 이해가 아닙니다. 로이드 존스의 말대로 그것은 부흥이 아니며 “어떤 의미에서 그것만큼 부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것”은 없다는 점에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셋째, 영적 상태에서의 회복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이안 머레이가 지적한 것처럼 부흥은 ‘성령의 인격 및 사역’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그는 부흥에 대해 “성령의 역사요, 인간의 마음과 생각과 의지에 성령께서 직접 역사하셔서 조명하고 새롭게 하시는 역사”라고 말했습니다. 로이드 존스 역시 부흥은 “지존하신 분으로부터 찾아오는 것이요, 성령의 부으심”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부흥이 성령의 역사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부흥에 대해 어떤 자세로 접근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부흥 운동을 단순히 머리나 학적으로만 연구하는 것은 부흥 운동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이드 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부흥을 일으킬 수는 없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청하고 탄원하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부흥 운동을 얼마든지 사람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산물이라고 이해한 적도 있고, 현재도 부흥사들이 이런 부흥을 가져올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도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부흥의 역사를 가져오시기 위해 그들을 도구로 사용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흥사들의 부흥회를 통해 부흥의 역사를 가져오는 것은 여전히 그 부흥이 어떠한 신적인 기원을 갖고 있기 때문이며, 부흥사는 단순히 도구로써 쓰임 받았을 뿐입니다.
부흥이 신적 기원이 있다는 것은 부흥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이라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흥의 역사를 실제로 경험한 패튼(W. W. Patton)은 ‘종교적 부흥’에서 부흥은 “성령의 섭리 가운데 어느 한 장소에서 특별한 능력이 임하고 성령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넷째, 부흥이 성령의 역사라는 사실은 그것이 인간의 작품이 아니라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부흥은 성령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주권적인 선물입니다. 부흥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총의 역사입니다. 그것은 아더 윌리스(Arthur Willis)가 적절하게 표현한 대로 죄인을 향한 거룩하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개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참고할 수 있는 부흥에 관한 저술들은 부흥이란 영적인 상태의 정상적인 흐름에 대한 신적인 개입을 의미한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하나님께서는 두려움을 불러일으키시는 거룩함과 불가항력적인 능력으로 자신의 모습을 인간에게 드러내 보여주신다. 그와 같은 역사 앞에서 인간은 볼품없는 존재가 되고, 그가 세운 모든 계획은 쓸모없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만다. 하나님께서 무대에 등장하실 때, 인간은 뒷전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다. 자신의 거룩한 손을 펴 보이시는 분도 주님이시고, 성자와 죄인을 특별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분도 주님이시다.”
지오프리 킹(Geofrey R. King)이 말한 것처럼 부흥이란 특별한 능력으로 개입하시는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입니다. 스티븐 올포드(Stephen Olford)의 말을 빌린다면 “부흥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찾아오시어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심으로써 충만한 은총을 받게 해주시는, 기이하고도 주권적인 역사로 이해될 수 있다”고 합니다. 부흥이 주권적인 성령의 역사라는 말이 인간의 책임을 간과하거나 무시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계속>
김종필 목사
미국 파토스 재단 대표
필리핀 한 알의 밀알교회 개척 및 위임 목사
미국 보스턴 소재 임마누엘 가스펠 센터 바이탈리티 소장 역임
미국 시티 임팩트 라운드테이블(City Impact Roundtable) 집행위원 역임
필리핀 그레인 오브 휘트(Grain of Wheat) 대학·대학원 설립자 및 초대 총장
영국 버밍엄 대학 철학박사(Ph.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