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에 소개하는 것은 1899년 우남이 한성 감옥에 들어간 바로 그해인 1899년 12월 28일과 그 이듬해인 1900년 2월 6일에 우남이 스승인 아펜젤러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이다. 우리는 이 글을 통하여 스승 아펜젤러와 그를 사랑한 제자 우남의 관계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존경하는 선생님께,

서양력에 대해서는 까마득히 잊고 있었기 때문에 이 무렵인 것은 확실하지만 어느 날이 성탄절인지 기억할 수가 없습니다. 이 편지를 귀한 선물 대신 새해 인사까지 겸한 성탄절 선물로 여기고 받아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행복, 강녕,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저희 가난한 가족들을 위해 값비싼 담요와 쌀, 그리고 땔감 등을 보내 주신 데 대하여 어떤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동시에 저와 같이 비참하고 죄 많은 몸을 감옥에 갇혀 있는 가망 없는 상태에서 구원해 주시고, 더욱이 의지할 데 없는 제 가족들에게 먹고 살아갈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얼마나 놀라운지요! 제 부친께서 편지로 선생님의 크신 도움에 감사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때는 저희 집이 아주 곤경에 처한 시기였습니다. 황량한 겨울이기 때문에 이곳, 어둡고 축축한 감방은 요즘 너무나 춥습니다. 대부분의 수용자들은 의복과 음식, 그 외에 모든 것이 부족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선생님의 자비로 저는 지금 옷이 충분하며 그래서 추위가 더 이상 저를 괴롭히지 못합니다. 다시 한번 선생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차후에 다시 글을 올릴 것을 기대하면서 오늘은 이만 그치겠습니다.

2월 28일 이승만”1)

“존경하는 선생님께,

이제 신정과 구정은 다 지나고 봄이 시작되었습니다. 번창과 축복과 행복이 특별히 선생님과 모든 크리스천 가족에게 일 년 내내 함께하시기를 하나님께 기도드립니다. 사모님에게 새해 인사를 전해 주시길 바랍니다. 부친의 편지로 선생님의 소식과 선생님께서 저의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신다는 것을 자주 듣고 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당연히 선생님께 고마움을 전하는 편지를 보내려고 하였습니다만, 그저 감사 감사하다는 말만 한다는 것은 소용이 없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비록 세상의 권세 있는 모든 자들이 나를 대항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질 것임을 확실히 믿습니다. 이 믿음이 저를 편안하게 해주며, 이 비참한 곳에서 행복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리하여 저는 책을 읽고, 간간이 시를 지으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잊을 수 없는 오직 한 가지는 연로하신 아버지와 모든 가족들이 겪는 말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2월 6일 이승만”2)

우남은 이 편지를 통하여 스승 아펜젤러가 가난한 가족들을 위해 값비싼 담요와 쌀, 그리고 땔감 등을 보내 주신 데 대하여, 또한 가족들에게 먹고 살아갈 양식을 주시는 것에 대하여, 우남의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신다는 것을 전해 듣고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것을 보게 된다. 실제로 당시 배재의 학생들은 200명이나 되었고, 또한 우남은 배재를 이미 졸업한 졸업생이었음을 생각해 볼 때에 아펜젤러가 우남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고 돌보아 주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것이다.

유영익 박사는 서양 모자를 쓰고 흰 양복을 입은 한 서양인이 감옥을 찾아서 죄수들을 면회하는 한 장의 사진을 자신의 책 『젊은 날의 이승만』의 표지 그림으로 넣었는데, 이 사진에서 서양 모자를 쓴 이 서양인은 바로 우남의 스승인 아펜젤러로 추정이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3) 우남도 스승 아펜젤러를 무한하게 존경하고 사랑한 것을 알 수 있다. 아펜젤러가 불의의 사고로 갑작스럽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소천하게 되었을 때에 그의 죽음을 가장 슬퍼한 사람은 옥중에 있었던 우남이었다는 것을 당시 기록이 보여주고 있다.

해가 바뀌면서 석방 운동의 핵심 인물이던 아펜젤러가 뜻밖의 사고로 사망함으로써 이승만은 정신적인 큰 고통을 겪었다. 아펜젤러는 1902년 6월 11일 목포에서 개최되는 성경번역위원회에 회합에 참석하러 가는 도중에 그가 탔던 배가 다른 배와 충돌하여 침몰하는 바람에 익사하고 말았다.4) 이승만은 은사의 비보를 듣자 하루 반을 내리 울고 단식했을 정도로 깊은 슬픔에 잠겼다.5)

아펜젤러가 더 오래 사셨다면 생전에 한국에 좋은 대학을 세우기를 원하시고 이미 계획에 착수하신 것으로 미루어 보아 한국의 대학 교육과 배재학당의 장래에 상당한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 감옥에서 어렵게 생활하던 우남의 인생에도 또 다른 변화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미주]
1) 김석영, 『처음 선교사 아펜젤러』, p. 173.
2) 위의 책, p. 173.
3) 유영익, 『젊은 날의 이승만』, 책의 겉장 안쪽에 표지 설명에서 이 글을 볼 수 있다.
4) 이만열 편, 『아펜젤러』, p453-454
5) 《朝鮮日報》, 1934년 11월 27일 자. “朝鮮新敎育側面史: 培材50年 座談會”, 손세일, 『이승만과 김구』에서 재인용, p. 87.

김낙환 박사(아펜젤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전 기독교대한감리회 교육국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