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는 그들의 침략 정책이 실패로 돌아간 것이 만민공동회 때문이었고, 이 배후에는 미국시민권을 가진 서재필1)이 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여 서재필 추방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다. 결국 외세의 압력에 의하여 서재필은 그해 5월 14일 미국으로 추방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전에 이 사실을 안 만민공동회는 1898년 4월 30일 숭례문 내에서 다시 모여 서재필의 유임을 위한 민중대회를 열었다. 그들은 여기서 서재필의 재고용을 정부에 요청하였고 서재필에게도 모국에 남아 있기를 청원하는 서한을 보낼 것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서재필의 유임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고, 서재필은 그렇게도 사랑하던 조국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독립협회 운동과 독립신문, 만민공동회는 그가 없이도 윤치호를 통하여 더 강력하고 더 과격하게 진행되었다. 여기에는 배재 협성회가 항상 앞장섰다.

왼쪽부터 서재필, 윤치호
▲왼쪽부터 서재필, 윤치호
만민공동회는 1898년 4월 30일 이후 거의 2개월 동안 쉬었다가 6월 20일 종로에서 개최했다. 여기에서는 무관학교 학생의 부정 선발을 비판했다. 7월 1일과 2일 이틀간은 종로에서 독일 등 외세의 이권침탈을 반대하는 만민공동회를 개최했다. 7월 16일에도 종로에서 의병에 의해 살해된 일본인 피살자에 대한 배상금 요구 반대와 일본의 경부선 철도 부설권을 반대하는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정치적으로 각성된 민중의 주장과 의사를 지속적으로 행동화해 나갔다. 그리고 일부 성공도 하였다.

이처럼 만민공동회 운동이 강력하게 전개되자, 대한제국 정부는 요구를 들어주는 척하면서 한편으로는 탄압했다. 정부는 독립협회의 정권장악 기도를 빌미로 삼아 독립협회와 더불어 만민공동회의 주요 인사들을 체포했다. 이에 반발하여 만민공동회가 시위운동을 전개하자 정부는 보부상들을 이용하여 이들을 무력으로 해산시켰다.

만민공동회 운동은 비록 정부의 탄압을 받아 실패하고 말았지만, 신분 해방의 생생한 현장으로서 대중성을 고양시킬 수 있었고 제국주의 경제침탈로 인해 직접 피해를 입고 있었던 도시소상인·소수공업자·빈민과 일부 지식인층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반제의식을 불어넣은 대중 정치 투쟁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2) 

[미주]
1) 서재필(徐載弼, 1864년 1월 7일~1951년 1월 5일), 미국 귀화명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은 대한제국의 정치인, 언론인이자 미국 국적의 조선 독립운동가, 언론인, 군의관, 정치인, 의학자였다. 미국에서 의사로 활동했다.
2)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do?docid=b07m1336a 만민공동회

김낙환 박사(아펜젤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전 기독교대한감리회 교육국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