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 있는 선교사들도 각 교파의 연합대학을 세운다는 뜻에는 이의가 없었으나, 대학을 세울 처소(處所)에 대해서는 결정하기가 곤란했다. 장로교 선교사들은 대부분 대학을 서울에 두는 것에 반대하며 평양의 숭실대학만을 두고자 했다. 같은 교파 안에서도 의견이 엇갈려 북장로교회는 대학을 서울 경신학교 안에 두고자 했고, 감리교에서는 서울 배재학당 안에 두고자 하면서 연합대학을 세우는 장소 문제로 극히 어려운 상황 가운데 있었다.

이렇게 쉬이 결정이 서지 못하는 형편을 보고받은 미국의 외국선교부연합위원회는 조선 각처로 세밀한 조사를 한 결과, 여론의 총 결론으로 서울에 연합대학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1914년 4월 베커(A. L. Becker) 박사의 주관으로 서울 정동 배재학당 안에 대학을 두기로 하고, 그 이름을 ‘배재대학부’라 호칭하여 개교하였으니 이것이 오늘의 ‘연희대학’의 전신이었다.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시절 전경(1930)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시절 전경(1930)

그러나 그때의 장로교 선교사들은 연합대학을 배재학당 안에 두는 것을 좋지 않게 여겼다. 특히 장로교 쪽에서는 ‘배재대학’이라고 불리는 것에 큰 불만이 있어, 경신학교로 그 위치를 옮길 것을 계속 고집하였다. 이에 장로교와 감리교, 두 파에서 설립하는 임시대학, 곧 ‘배재대학부’와 ‘경신대학부’를 연합대학으로 하자는 주장에서 전환하게 된다.

장로교의 베이커 선교사는 기어이 배재학당 안에 있는 ‘기독교연합대학’을 1916년 4월 종로에 있는 기독교청년회관 아래층으로 옮겨갔고, 이 때문에 양측의 충돌은 불가피하게 노출되기에 이르렀다. 이 대학은 연합대학으로 인가(認可)가 나오기까지 ‘경신학교대학부’라는 간판을 걸고 있었다. 그리고 1917년 4월 7일에 왜정 총독부로부터 ‘사립연희전문학교 기독교연합재단법인’과 ‘연희전문학교’라는 이름으로 인가를 받게 되었다. 학제로는 문과(文科), 신과(神科), 상과(商科), 수물과(數物科), 응용화학과(應用化學科), 농과(農科)의 여섯 과로 되었는데, 교직원은 18명이고 학생은 89명이었다.

하월곡동 배재대학 기공식 모습(1959). 4·19로 인해 대학 건축이 중단되었다가 후에 대전에 터를 잡게 되었다.
▲하월곡동 배재대학 기공식 모습(1959). 4·19로 인해 대학 건축이 중단되었다가 후에 대전에 터를 잡게 되었다.

여기에서 보듯이 ‘기독교연합대학’의 설립은 우여곡절 끝에 결정되고, 배재학당이 그 설립 장소로 선정되었지만, 여전히 각 교파 간 이해갈등이 해소되지 못하였던 모양이다. 장로교 측에서 ‘기독교연합대학’을 경신학교로 옮기자, 이때부터 감리교 측은 대학 설립에서 사실상 손을 떼고 말았다. 이로써 ‘배재대학부’는 아주 짧은 역사에 그 이름만 남긴 채 아무런 졸업생도 배출하지 못하고 유야무야 마감되었다.

본의 아니게 숙원사업으로 남게 된 배재학당의 대학 설립 계획은 해방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한때 서울 월곡동 일대의 부지를 마련하고 적극 추진한 적도 있었으나 다시 불발에 그치고 만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1977년 학교법인 배재학당이 대전 보육학원을 합병하여 ‘대전여자초급대학’을 ‘배재대전초급대학’으로 전환시킴으로써 배재학당의 대학 설립 계획은 마침내 그 결실을 얻게 되었다. 이 ‘배재대전초급대학’은 오늘날 대전에 위치한 ‘배재대학교’이다. <계속>

김낙환 박사(아펜젤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전 기독교대한감리회 교육국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