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재학당의 역대 교장. 1대 아펜젤러 선교사, 2대 하운젤 선교사, 3대 벙커 선교사, 4대 한국인 최초 교장 신흥우
▲배재학당의 역대 교장. 1대 아펜젤러 선교사, 2대 하운젤 선교사, 3대 벙커 선교사, 4대 한국인 최초 교장 신흥우
바. 배재학당 이름의 변화

‘배재(培材)’는 곧 ‘배양영재(培養英材)’의 준말이다. 즉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양육한다는 의미로, 고종은 친히 ‘배재학당’이라는 교명을 지어 외무아문을 통해 학교의 이름과 이를 새긴 현판을 아펜젤러에게 전달하였다.

아펜젤러는 이날을 ‘1887년 2월 21일’이라고 일기에 적고 있다. 그리고 이 일은 조선 정부가 자신의 교육 사업을 정식 허가한 것으로 생각해도 좋을 것이라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은 일제 식민시대를 지나면서 정치적인 이유로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 변경되어 불리다가 결국은 오늘날과 같은 ‘배재중·고등학교’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이 장에서는 변경된 이름들과 변경된 이유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아펜젤러가 돌아가신 지 4년이 지난 후인 1906년, ‘배재학당’은 ‘배재고등학당’으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1906년 8월 31일 국가에서 칙령 42호가 발표되고, 1909년 7월 9일에 고등학교령 시행규칙이 학부령 제4호로 발포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1909년 4월 23일 구한국의 학부령에 의하여 ‘배재고등학당’으로 인가를 받은 것이다.1)

당시 신흥우 한국인 교장은 ‘배재학당’과 ‘배재고등학당’이라는 이름으로 두 개의 학제를 동시에 운영하였다. 일인(日人)들에 의하여 식민통치를 받던 조선은 교육하는 일에 자유롭지 못하였다. 총독 데라우치는 ‘조선 사람들을 심부름할 수 있는 정도의 교육’을 베풀려고 했다. 1913년 2월 6일 13도의 내무부장 회의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오늘날 조선은 고상한 학문을 시킬 정도에 이르지 아니하였다. 보통교육이나 베풀어서 한 사람으로서 일할 수 있는 인간을 만드는데 눈을 두지 아니하면 안 된다. 따라서 학교는 이 목적으로서 교육을 진행시키고 졸업한 자가 집에 돌아가 선진자로서 동포를 지도할 수 있는 지식이나 주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보통교육에서도 실업에 대한 지식을 불어 넣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2)

데라우찌는 한국인에게 고등교육을 베풀지 않았다. 식민지의 교육이란 절대로 지도자로서 인물을 양성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행정, 산업, 기술에서 노예적인 심부름꾼을 만드는 정도에서 실업(實業) 교육이나 기술교육을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교육방침의 결과 ‘배재고등학당’은 다시 ‘배재고등보통학교’라는 이름으로 변경하게 되었다. ‘배재고등학당’은 1916년 2월 1일 ‘고등보통학교’로서 정부의 인가를 받게 된다. 당시에 고보(高普)라는 이름과 학당(學堂)이라는 이름이 함께 사용되다가, 1925년 일본인들의 성화에 못 이겨 결국 학당(學堂)이라는 이름은 폐지되었다.3)

1939년 3월, 일인(日人) 미나미는 새 교육령을 발표하였다. 그것은 조선에서 ‘고등보통학교’라는 이름을 바꾸어 ‘중학교’라고 부르게 하는 것이었다. 보통이라는 이름을 빼버림으로써 일본인들이 다니는 학교와 동등한 교명을 사용하여 일본인과 조선인의 차별을 없앤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일인들의 아주 비열한 계략이었다. 그 내막은 조선인들을 아주 일본인으로 만들어 대동아 전쟁과 미일 전쟁에 내몰려고 한 책략이었던 것이다.

동시에 미나미는 일본 정신을 강화하려는 계략으로, 조선 전국의 사립학교 교장이나 교무주임 직임을 일본인들이 차지하는 방침을 세우고 실행하여 조선인들의 교육은 거의 파멸에 가까운 경지를 경험하게 되었다. 배재학당도 이 당시 ‘배재중학교’로 교명을 바꾸고 6년제로 운영되었다.

해방 직후 유억겸 문교장관은 반일(反日) 교육으로 일제의 잔재를 근절시키는 한편 자주독립 정신을 배양시키려 하였고, 비로소 6·6·4년제의 학제를 마련하게 되었다. 2대 문교장관인 오천석은 민주주의 교육을 부르짖었다. 일제의 제국주의 교육에서 억압받은 교육을 버리고 새 교육이라는 목표를 세워 중학을 3·3으로 나눠 중학 3년, 고등학교 3년으로 하였다. 또 중학 3년을 졸업이라 하지 않고 수료(修了)라 하였으며, 고등학교에 진급하는 것으로 하였다.

오늘날과 같은 ‘배재중·고등학교’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비로소 1951년도의 일이었다. 해방이 되고 6.25전쟁의 혼란 중에도 교육 활동은 계속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교육법 개정에 따라 고등학교 3년과 중학교 3년 학제를 마련하여 교명을 ‘배재중·고등학교’로 변경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교명(校名)은 지금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계속>

[미주]
1) 김세한, 『배재 80년사』 p. 316
2) 데라우찌, 1913년 2월 6일 13도의 내무부장 회의
3) 김세한, 『배재 80년사』 p. 370. 「오십년 교육사업」 H. D. 아펜젤러 저에서 재인용 함

김낙환 박사(아펜젤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전 기독교대한감리회 교육국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