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기껏해야 50명 내외에 머물렀던 배재학당의 학생 수가 급격히 증가했을 때는 1895년 이후의 일이었다. 당시 정부에서 직접 운영하던 육영공원(育英公院)이 폐지되고, 이에 대체하여 관립영어학교(官立英語學校)가 개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배재학당의 영어교육이 훨씬 더 낫다는 인식이 퍼진 탓에 이쪽으로 학생들이 대거 몰린 결과였다.
아울러 1895년 2월 16일에는 조선국 정부와 배재학당 사이에 ‘관비생 200명의 위탁교육을 위한 계약’이 체결되면서 최초로 50명의 학생을 신규로 받아들이는 대신, 정부의 지원금을 받아 운영하기에 이르렀다. 이 계약은 1898년과 1900년에 두 차례 갱신되어, 배재학당은 1901년 8월까지 6년 6개월간 대한제국 정부의 지원을 받는 관립학교에 준하는 위상을 확보하게 되었다.
더구나 1903년 봄부터는 창립 이래 처음으로 학생들에게서 수업료에 해당하는 학기금(學期金)을 받기 시작했다. 또 영어를 교수어(敎授語)로 사용하는 것을 폐지하고 전 과목을 한국(韓國)말로 가르치는 한편, 영어를 정규 교과목에서 제외하는 조치가 단행되었다. 이에 따라 영어를 배우기 위해 배재학당으로 몰려든 학생들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보다 앞서 1902년에는 초대 교장으로 배재학당의 기초를 닦았던 아펜젤러 목사가 목포로 가던 길에 뜻하지 않은 난파 사고로 익사하였고, 후임으로 남감리회 출신의 하운젤, 그다음 육영공원 교사 출신 벙커(Dalzella A. Bunker, 房巨, 1853~1932)가 차례로 배재학당의 운영을 책임졌다. 비록 아펜젤러는 먼저 세상을 떠났으나, 당초 그가 생각했던 교육선교의 이념은 후대 사람들의 손으로 하나씩 이뤄졌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 아닌가 한다. <계속>
김낙환 박사(아펜젤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전 기독교대한감리회 교육국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