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무렵 배재학당의 학생 수가 차츰 늘어나자 아펜젤러는 벽돌로 1887년에 학교 건물을 신축하였는데, 이것이 배재학당 본당 건물이다. 대부분의 자료에는 이 건물이 1886년에 세워진 듯이 설명하고 있으나, 준공 시기는 아펜젤러 본인의 기록에 따라 1887년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일본인 건축가 요시자와 토모타로(吉澤友太郞)가 설계한 것으로 확인되는 이 건물의 건립 과정과 건축 구조에 대해서는 『배재사』에 다음과 같이 설명이 남아 있다.

“1886년 8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그해 11월 1일에 낙성(落成)한 옛 배재학당의 벽돌집 강당은 한국의 최초의 벽돌집 서양식 양옥(洋屋)이었다. 아펜젤러 교장이 인천항에 상륙하였을 때 조선 사람으로서 맨 먼저 알게 된 분이 송헌성(宋憲成) 씨인데, 어학교사(語學敎師)로도 있었으며 무척 친한 터였다. 강당 신축 공사의 감독(監督)을 송헌성 씨가 하였으며, 그때의 도편수1)는 심의석(沈宜碩의 오류) 씨가 맡아서 지었다. 이 심의석 씨 밑에서 김덕보(金德甫)라는 목수(木手)가 있었으며, 심의석 씨는 배재 강당을 지은 인연으로 후에 내무아문기사(內務衙門技師)가 되었다.

초기 배재학당 모습
▲초기 배재학당 모습
강당의 구조(構造)는 벽돌을 쌓아 올려 지붕은 기와로 잇고, 크고 길게 세운 창문은 아치식으로 되어 쇠로 만들었다. 현관(玄關=앞문)은 큰문이 가운데 있고, 작은 문이 양편에 둘로 되었으며, 양편으로 돌기둥을 지붕 키와 같이 높이 세워 맨 위는 예쁘고 아름답고 둥글게 열어 창으로 뾰죽하게 하였고 아치식으로 되었다. 현관 기둥의 지붕 위로 기둥 사이에는 로마자(字)의 큰 시계(時計)를 박았으며, 추녀 서까래의 지붕 처마에는 빙 돌려 철판(鐵板)을 넓게 돌리고 간격을 맞춰서 별 모양의 쇠를 붙이었다.

연통(煙筒)은 지붕 위의 후면 좌우에 세웠으며 서까래 밑과 창 위의 사이로 돌로 둥글게 이층으로 겹 놓아서 돌아갔고, 북쪽으로 난 큰 뒷문 위에는 종각(鍾閣)을 세웠고, 벽돌과 돌로서 순전히 지은 건물이었다. 이 강당은 아담하고 예쁘며 시집갈 각시가 황홀지게 단장한 것처럼 멀리서 보기에 희게 붉게 분장(粉裝)한 것 같았다.”2)

옛 배재학당 터에 세워진 표석
▲옛 배재학당 터에 세워진 표석
이렇게 세워진 반지하, 1층 지상, 1층 구조의 건물 안에는 강당과 4개의 교실, 도서실, 당장실, 지하실 등이 갖추어져 있었으며, 나중에 기와지붕이 수리될 때 함석지붕으로 교체된 것을 제외하고는 1929년 철거 시까지 기본 외형은 그대로 유지하였다.

이보다 약간 늦게 배재학당 본당 건물의 뒤편, 즉 서편에는 선교사 올링거(Franklin Ohlinger, 武林吉, 1845~1919)가 개설한 삼문출판사(三文出版社, The Trilingual Press) 건물이 따로 있었다. 아쉽게도 이 건물의 정확한 건립연대는 1892년 이전이라는 사실 정도만 확인되고 있을 뿐 잘 알지 못한다. 이 건물 역시 삼문출판사의 폐쇄 이후에 그대로 배재학당으로 넘겨져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다가, 1929년에 이르러 본당 철거 시 함께 헐리고 말았다. <계속>

[미주]
1) 조선 후기 건축 공사를 담당하던 기술자의 호칭
2) 김세한 『배재사』 p. 92-93

김낙환 박사(아펜젤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전 기독교대한감리회 교육국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