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은 아펜젤러 선교사(H. G. Appenzeller, 1885~1902)가 1902년 6월 11일 순직한 지 꼭 120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 글은 존스 선교사(G. H. Jones, 조원시)의 아펜젤러 1주기 추도문으로, 1903년 5월 정동교회에서 열린 제19회 한국선교연회 일정 중 아펜젤러 1주기 추도식에서 낭독되었다. 아펜젤러 순직 120주년을 맞아 아펜젤러의 정신을 잇고 그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고자, 1903년 연회록 68~72쪽에 게재된 이 추도문을 원문에 충실하도록 직역했다. <역자 주>
H. G 아펜젤러(1858. 2. 6.-1902. 6. 11. 44세)
헨리 게하르트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는 전도자, 선교사, 교육자, 편집자, 그리고 번역자로 뛰어난 인품을 가진 성실한 일꾼이었습니다. 1858년 2월 6일, 펜실베이니아의 수도 수더튼(Souderton)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그곳에서의 어린 시절을 통해 그를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케 한 근면, 자립, 자존의 습성을 익혔습니다. 또한 그의 선교 초기에 겪은 어려움과 고생 가운데서도 굳게 지켜나간 육체적 건강을 여기에서 얻었습니다. 그의 조상은 원래 독일계 스위스 캔톤스(Cantones)의 아펜젤(Appenzell) 계곡 출신으로 현재까지 이 이름을 성으로 사용했습니다. 초기의 종교교육은 독일 루터교회에서 받았으며 일생동안 복음주의 교회의 감독장(grand old communion primus)의 지고한 권위와 경건함을 나타내주는 위엄을, 그의 공식적인 선교활동을 통해서 보여주었습니다. 대학에서 교양과정을 준비하면서, 얼마 동안 공립학교에서 교사로 지낸 후 1878년, 고향에서 가까운 펜실베이니아주 랭커스터의 프랭클린 마샬대학(Franklin and Marshall College)에 입학했습니다. 당시 그는 20세였습니다. 이 기간에 그는 감리교회에 입회하여, 여기에서 평신도 전도자(Lay Preacher)로서 전도에 대한 소명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초기부터 그의 사역은 필연적으로 선교사였으며, 그의 첫 번째 파송은 학생 시절 때 그가 다니던 랭커스터의 제일교회에서 운영하는 작은 선교처였습니다. 일생동안 선교사로 지내다가 이국땅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그 후 언제나 그가 명예롭게 생각하는 문학사를 수여해준 프랭클린 마샬대학의 교양학부를 졸업한 뒤, 1882년 가을 감리교회의 선교를 위한 완벽한 자격을 갖추기 위해 드류 신학교(Drew Theological Seminary)에 입학했습니다. 장엄한 신학부의 환경에서 그의 성격과 재능은 최고로 유능한 선교사의 자질을 위해 훈련받았습니다. 버츠(Buttz) 학장, 밀레이(Miley) 박사, 스트롱(Strong) 박사, 업햄(Upham) 박사, 크룩스(Crooks) 박사와 같은 분들의 교습과 지도로 그는 교회가 자랑할 만한 자질을 갖추었습니다. 이러한 분들은 그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일생동안 그분들 밑에서 보낸 날의 기억들은 기쁨이 되었으며, 언제나 그들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드류에 있는 동안에도 적극적인 선교활동과 사업을 계속하여 대학에서 주어지는 최고의 선물인 파송을 받을 때까지 그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오늘날까지 그는 드류에서의 기억이 아름답게 남겨진 채 떠나갔습니다. 많은 동기생이 교회에서 이미 명예롭고 책임 있는 일을 맡고 있으나, 그들보다 뒤지지 않는 훌륭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하기 전 그는 해외선교에 헌신키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때 볼티모어의 가우처(John F. Goucher) 박사의 많은 헌금으로 가능케 된 한국 선교를 위한 선교사가 요청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부름에 기꺼이 응했습니다. 1884년 12월, 그의 일생에 가장 중요한 두 사건이 일어났는데, 하나는 펜실베이니아 랭커스터의 엘라(Ella J. Dodge) 양과의 결혼이고, 또 하나는 한국으로의 파송입니다. 1885년 1월, 대학 졸업 시험에 합격하고 신학사의 학위를 받고 졸업했으며, 그는 아내와 함께 그들의 선교지로 떠날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선교부의 설립을 위해 스크랜튼 박사 부부와 그의 어머니 스크랜튼(M. F. Scranton) 대부인과 함께 동행 하였습니다.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파울러(Fowler) 감독을 만나 아펜젤러는 집사목사(Deacon)와 장로목사(Elder) 안수를 받았으며, 그가 일생 동안 회원으로 지낸 필라델피아 연회의 회원이 되었습니다.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서 잠시 그의 동료들과 감리교 한국선교부(the Korea Mission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를 조직하였는데, 명목상 감리사는 중국과 일본에서 오래 활동한 맥클레이(R.S. Maclay) 박사가 되었으며, 아펜젤러는 부감리사(Assistant Superintendent)가 되었습니다. 1885년 4월, 한국에 도착하여 이때부터 아펜젤러의 일생은 한국인들 가운데 그리스도의 왕국을 세우는 일에 헌신하였습니다. 한국에서 17년 동안 그가 행한 일들을 하나씩 더듬어보는 것은 한국 기독교 역사의 많은 부분을 기술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서술은 한국교회 기록의 많은 양이며 동시에 매우 훌륭한 것이며 감리교회(Methodism)가 앞으로 계속 자부심을 가지게 되는 것 중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업적 중에서 매우 극소수만을 기술하게 될 것입니다.
1887년, 그는 한국에서 전임 감리사(Full Superintendent)가 되어 1892년에 안식년 휴가로 미국에 돌아갈 때까지 이러한 중요하고 고귀한 업무에 지칠 줄 몰랐습니다. 저급한 문명의 상태에서, 은둔자와 같이 어둠과 무지의 사람들과 함께 초기의 상황에서부터 복잡한 문제에 직면하고 해결해야 할 난관을 만났습니다. 그가 일하는 가운데 당면한 육체적이고 도덕적 문제는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직면한 난관은 가장 강건한 정신의 소유자도 꺾일 만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만약 좀 더 약한 사람이었다면 모두 포기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는 어떠한 교사나 심지어 책도 없이 언어를 습득했습니다. 이국인들에 대해 의심하고 증오하는 나라와 화해해야만 했습니다. 또한 기독교는 모든 쓸모없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믿는 이들에게 기독교를 옹호해야만 했습니다. 그는 모든 장애물을 인격, 능력, 그리고 선한 성품의 힘으로 극복해 나아갔습니다.
그는 배재대학(Paichai College)을 설립하여 그의 대부분의 선교사 활동을 학교의 교장으로 봉직하였습니다. 초기 감리교회의 개종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는데 이들은 이 나라의 최초 교회의 기초를 닦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는 글로 자신을 나타냈고 한글을 사용했고, 한글로 성경을 번역하는 일을 도왔습니다. 그는 공공심을 가진 자이며 연합교회(the Union Church), 대한성교서회(Korean Religious Tract Society), 서울 유니온(the Seoul Union), 외국인 묘지협회(the Cemetery Association), 대영 왕립 아시아학회의 한국지부(the Korea Branch of the Asiatic Society)의 중추적인 회원이 되었습니다. 사실상 그는 지역 사회의 중요한 인물이었으며, 모든 방면에서 그렇게 인식되었습니다.
선교사로서 그는 많은 여행을 한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반도의 한쪽 끝에서 다른 끝까지 알려졌습니다. 그는 이 나라의 모든 지역을 여행하였으며 사람들과 매우 친근한 관계를 가졌습니다. 일하던 인부도 일하다 말고 그에게 인사를 했고, 친구들에게 존경하는 그에 대해 설명을 했습니다. 학자들도 그의 박식과 교육과 그의 활동에 대해 존경을 표했습니다. 양반 계층들도 그들의 친구로서 그를 대하기를 기뻐했습니다. 정부에서도 그를 진정한 친구로서 여기게 되었으며, 더 나아가 중요한 자리에 함께 하여 국사를 논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동료와 함께 ‘코리안 리포지토리’(The Korean Repository)를 편집하여 5권까지 발행하였는데, 이 책자는 오늘날 영어로 된 것으로는 한국에 관해 모은 글 중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의 삶과 가르침은 한국교회에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들은 그의 커다란 사랑을 알았고, 깊고 지속적인 애정으로 이를 보답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그를 신앙의 아버지로 삼아 전국각지에 흩어져서 일생동안 지속될 축복으로 그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삶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미래의 한국교회의 역사가에게 남겨둡니다. 이것은 다른 교회 역사의 내용들과 매우 긴밀하게 짜여 있기 때문에 다른 요소들을 희생하지 않고서는 다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매우 창조적인 인격의 사람으로 일생의 과업을 위한 계획은 매우 풍부했습니다. 선교본부에서 그에게는 선교사에게 맡겨지는 모든 가능한 사업들을 거의 모두 요청했습니다. 여러 번 그는 감리사, 대학교 학장, 회계, 장로사, 편집자, 번역가의 일을 감당했습니다. 선교사로서 그는 가장 열심히 일하였으며, 매우 훌륭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1902년 5월, 평양에서 열린 연회에서 그는 한국 남부 지방의 장로사로 임명되었습니다. 얼마 후 무어(Moore) 감독과 함께 자신의 관할지역 중 한 곳을 방문하던 중, 일본의 철도노동자 일당들에게 습격을 받아 부상당했습니다. 공격자들은 구속되었으며 아펜젤러는 목포에서 개최되는 성경번역위원회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재판의 증인으로 서기 위해서 얼마동안 서울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습니다. 불가피한 사정으로 머물러 있다가 오사카 상선회사인 구마가와 마루(the Kumagawa Maru)라는 증기선을 타게 되었습니다. 그는 한국인 조사와 부모에게 데려다주기로 한 어린 한국 소녀를 책임졌습니다. 6월 11일 밤, 남쪽으로 항해하던 이 배는 같은 회사의 또 다른 증기선 기소가와 마루(the Kisogawa Maru) 호와 충돌하여 침몰했습니다. 그 사고는 매우 순식간에 일어났으므로 어떤 상황들이 벌어졌는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생존자의 말에 의하면 마지막 순간에 2등 선실로 향하는 승강구로 그가 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러한 위험과 죽음의 순간에서도 그는 자신이 맡은 한국인들만이 그의 관심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삶에 있어서 그의 마지막 노력은 한국인을 돌보고 염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불운한 배와 그가 사랑한 한국인들과 함께 사라졌습니다. 바닷물은 그를 삼켰고 그의 무덤을 간직하고자 하는 우리의 작은 소망도 앗아갔습니다. 우리는 다만 흰 거품이 출렁이는 짠 바닷물이 순식간에 사랑하는 형제의 모습을 삼켜버렸다는 사실만 알 뿐입니다. 그는 안식처를 나타내는 비석이나 장식도 없는 회색빛의 쓸쓸한 바다 속에 잠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무덤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것입니다. 우리는 그가 죽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것은 뒤에 남겨진 우리의 마음속에 그가 결코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가 죽은 뒤에 웅장한 기억만을 남겨둔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형제는 더 큰 것을 남겼습니다. 그는 그가 도와주었던 많은 사람의 삶 속에 그의 자신을 도덕적 선함(Moral Good)으로 투영시켰으며, 그는 영원히 우리 삶에 살아있습니다. 종소리는 그치고 조용해졌으나 그 달콤하고 은은한 소리는 아직도 그가 풍요롭게 해 주었던 사람들의 말과 행동 속에 울리고 있으며, 많은 영혼의 은밀한 마음 한구석에서 헨리 게하르트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의 이름이 언급될 때마다 축복의 기도가 속삭이고 있습니다.
“주여 앞장서옵소서, 제가 따르겠나이다.
진리와 충성으로 최후의 순간까지 따르겠나이다.”(H. G. Appenzeller)
글쓴이: G. H. 존스
역자: 노종해 선교사(CM리서치, 정동제일교회 원로목사, 전 감신대·목원대·협성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