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당시는 의료 사업과 교육 사업을 목적으로 한 선교사의 입국만 허용되었으므로, 자연히 그는 교육 사업에만 주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아펜젤러는 스크랜튼 의사의 집 옆에 있던 안기영(安驥永)이라는 사람의 집을 한화 7,250량, 미화로 568달러 상당의 금액으로 사서 학교를 개설하였다. 지난 1955년에 창립 70주년 기념으로 정리된 『배재사』에서는 창립 초기의 상황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다만, 여기에는 몇 가지 항목에서 다소간 오류가 포함되어 있어 유의할 필요가 있다.
“1885년 7월 29일 서울에 들어와 의사 스크랜튼이 집 한 채를 그때 돈으로 7,250량, 미화로 568불을 주고 사서 들고, 두 칸 벽을 헐고 교실 하나를 만들었다. 이 교실이 바로 서소문동 47번지 지금 교문 맞은편 우일사(又一社) 자리였으며 그때의 건물은 헐리었다. 이겸라(李謙羅)와 고영필(高永弼)이라는 두 학생을 앞에 앉히고 역사적인 처녀 수업을 8월 3일에 개시하였으니 이 아름다운 찰라는 한국의 신교육사상에 있어서 효시(嚆矢)인 배재학당에서 이루어진 것이다.”1)
교실이 좁아서 10명을 받아들일 수가 없으므로 불현듯 교사 확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정동 34번지 현재 학교가 깔고 앉아 있는 교문 수위실 뒷자리에 있던 김봉석(金奉石)이라는 사람의 기와집 100평과 대지 100평을 그때 돈 520냥, 미화로는 388불을 주고 사들여서 개축 수리하고 교실을 옮겼다. 그럼에도 학생의 수는 계속 늘어가고 교실이 좁으므로 그 부근에 있는 초가집과 기와집과 향나무(지금 동교사 옆)까지 합쳐 3,000냥을 주고 사들여 수리를 하여 교실을 분산시켜놓고 수업을 하게 되었다. <계속>
[미주]
1) 김세한, 『배재사』, p. 88-89
김낙환 박사(아펜젤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전 기독교대한감리회 교육국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