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펜젤러가 자리 잡은 1899년 서울 정동 일대
▲아펜젤러가 자리 잡은 1899년 서울 정동 일대
1885년 8월 3일. 이날은 27세의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가 최초의 신식학교로 기록된 배재학당의 문을 연 날이다. 그가 조선에 도착한 것은 그 해 6월 20일이었으므로, 불과 한 달 보름여 남짓한 시점의 일이었다. 물론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이 정식으로 지어진 것은 이듬해의 일로 아직은 『영어학교(英語學校)』라는 이름으로 통용되던 시절이었다.

이 당시는 의료 사업과 교육 사업을 목적으로 한 선교사의 입국만 허용되었으므로, 자연히 그는 교육 사업에만 주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아펜젤러는 스크랜튼 의사의 집 옆에 있던 안기영(安驥永)이라는 사람의 집을 한화 7,250량, 미화로 568달러 상당의 금액으로 사서 학교를 개설하였다. 지난 1955년에 창립 70주년 기념으로 정리된 『배재사』에서는 창립 초기의 상황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다만, 여기에는 몇 가지 항목에서 다소간 오류가 포함되어 있어 유의할 필요가 있다.

“1885년 7월 29일 서울에 들어와 의사 스크랜튼이 집 한 채를 그때 돈으로 7,250량, 미화로 568불을 주고 사서 들고, 두 칸 벽을 헐고 교실 하나를 만들었다. 이 교실이 바로 서소문동 47번지 지금 교문 맞은편 우일사(又一社) 자리였으며 그때의 건물은 헐리었다. 이겸라(李謙羅)와 고영필(高永弼)이라는 두 학생을 앞에 앉히고 역사적인 처녀 수업을 8월 3일에 개시하였으니 이 아름다운 찰라는 한국의 신교육사상에 있어서 효시(嚆矢)인 배재학당에서 이루어진 것이다.”1)

아펜젤러 선교사(맨 뒷줄 오른쪽)와 배재학당 초기 학생들
▲아펜젤러 선교사(맨 뒷줄 오른쪽)와 배재학당 초기 학생들
정동의 한 모퉁이를 차지한 배재학당에서 신교육이 우선 시작되어 두 학생이 갓을 쓰고, 도포를 입고 장죽을 들고 매일 두 시간씩 수업을 받았다. 이듬해 봄에는 학생이 불어서 갓을 쓰고 수염이 검은 여섯 명의 학생이 “A(에이), B(비), C(씨)” 하면서 시대의 학문을 남보다 먼저 알고자 열심으로 공부를 했다.

교실이 좁아서 10명을 받아들일 수가 없으므로 불현듯 교사 확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정동 34번지 현재 학교가 깔고 앉아 있는 교문 수위실 뒷자리에 있던 김봉석(金奉石)이라는 사람의 기와집 100평과 대지 100평을 그때 돈 520냥, 미화로는 388불을 주고 사들여서 개축 수리하고 교실을 옮겼다. 그럼에도 학생의 수는 계속 늘어가고 교실이 좁으므로 그 부근에 있는 초가집과 기와집과 향나무(지금 동교사 옆)까지 합쳐 3,000냥을 주고 사들여 수리를 하여 교실을 분산시켜놓고 수업을 하게 되었다. <계속>

[미주]
1) 김세한, 『배재사』, p. 88-89

김낙환 박사(아펜젤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전 기독교대한감리회 교육국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