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민주화(民主化), 독립운동(獨立運動)의 태동
아펜젤러의 교육 활동은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기독교를 전함과 동시에 서양의 민주주의 정치와 발전된 근대식 문화, 자유주의 사상을 자연스럽게 가르치고 전하게 되었다. 더욱이 학교가 세워진 지 10여 년이 지난 1895년 이후로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폐교하게 된 국립영어학교인 육영공원(育英貢院) 학생들을 병합한 학당1)은 학생들이 갑자기 불어나게 되었다.
때마침 갑신정변의 실패로 망명하여 미국에서 10년간 교육을 받고 입국한 민족주의자요, 개혁가인 송재 서재필과 역시 갑신정변의 실패로 중국으로 가서 중서서원에서 교육을 받고, 다시 미국으로 거처를 옮겨 최고의 학문을 사사 받고 미남감리회의 교인이 되어 입국한 윤치호가 배재학당에 교사로 합류하게 되면서 교육은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민주주의, 민족주의, 계몽주의 성격을 띤 교육이 더욱 강화되었던 것이다.
한 말 근대적 자주민권운동의 기폭점이 된 협성회는 강력한 정치적 성격을 띠고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학생 조직으로, 배재의 학생회가 효시(嚆矢)가 되었다. 이와 같은 민주적 학생단체가 배재학당 안에서 태동이 된 것은 전제군주 체제였던 당시의 정치 상황에 비추어 당연하고도 필연적인 결과였다.
이 장에서는 조선의 민주화 운동과 독립운동의 태동이 된 배재학당의 학생운동인 협성회와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등에 관하여 살펴볼 것이다. <계속>
[미주]
1) 1895년 12월 6일 육영공원에서 공부하던 국비생 200여 명을 배재학당으로 위탁하였다.
김낙환 박사(아펜젤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전 기독교대한감리회 교육국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