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배재학당 교사진과 학제(學制), 과목(科目)

배재학당이 처음 세워지고 3년째 되던 해, 아직 학당 규칙이 발표되기도 전(前)인 1889년 당시 활동하던 교사진과 학제, 교과목은 다음과 같다. 당시의 학제를 볼 때 아펜젤러는 학당을 대학과정으로 시작하였음이 분명하다. 또 처음 몇 년간은 대부분 모든 과목을 선교사들과 그 부인들이 가르쳤기에 한문 수업을 제외한 모든 수업은 영어로 진행되었다. 한문(漢文)으로 된 유학(儒學)만 가르치던 조선에서 선교사들에 의하여 처음으로 가르치게 된 과목(科目)들이 많았다는 것이 눈여겨 살펴볼 대목이다.

◇1889년 교사진

영문학: 교장 헨리 G. 아펜젤러, 석사
역사: 프랭클린 올링거, 석사
수학: 조지 H. 존스. 석사
의학: 윌리암 B. 스크랜톤, 의학박사
과학: 리차드 하크니스, 학사
음악: 베르타 S. 올링거 부인
미술: 엘라 D. 아펜젤러 부인
한문: 송보산, 유치겸
도서관 사서: 강재형

왼쪽부터 배재학당 교사진으로 활동한 조지 히버 존스(1867~1919), 윌리암 스크랜톤(1855~1922)
▲왼쪽부터 배재학당 교사진으로 활동한 조지 히버 존스(1867~1919), 윌리암 스크랜톤(1855~1922)
당시 교과과정은 가장 초보자들을 위한 ‘예비부’와 그보다 한 단계 위인 ‘일반 교양부’를 두었다. 그리고 또 그 위에 ‘대학과정’을 두었고, 대학과정에는 신학부, 의학부를 두어 전문지도자를 양성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과 형편을 고려하여 과목 혹은 학제가 조금은 유동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에 소개하는 것은 당시 교과과정인데, 이러한 교과과목들 가운데 한문을 제외한 대부분 과목은 조선에서는 처음으로 가르치는 과목들로 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에서 유학을 공부하며 자란 세상 물정에 어두웠던 조선 학생들에게는 거의 혁명적인 수준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교과 과정

1) 예비학부(Preparatory Department)
1학기: 영어 독본 1권, 한문, 언문
2학기: 영어 독본 2권, 철자, 한문, 언문

2) 일반 교양부(Academy Department)
1학년: 영어 기초문법, 산수 초보, 독본 3권·4권, 철자, 쓰기 및 노래 부르기, 한문, 언문
2학년: 영문법, 산수(10진법), 일반과학, 독본 5권, 철자, 번역, 쓰기 및 노래 부르기, 한문, 언문
3학년: 영문법, 영작문, 산수, 한문, 언문, 일반과학, 지식의 계통, 어원학, 미술, 노래 부르기

이 교과목들은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영어 과목을 전 학년에서 가르쳤는데, 상당히 체계적으로 가르쳤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가장 쉬운 것으로 시작하여 점차 어려운 것으로 수업이 진행되었고, 학년에 따른 교과서들을 이미 만들어 사용하였다는 것이 매우 흥미롭다.

둘째, 한문과 언문(諺文)을 전 학년에서 동시에 가르쳤다는 것이다. 한문은 당시 조선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배우던 과목이었는데, 이를 다시 학당에서 가르친다는 것은 아펜젤러가 조선인의 전통을 보존하려 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동시에 조선의 고유한 문화를 보존하려 했던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당시 조선의 대부분 사람이 주로 사용하는 문자가 한자였기에 한문을 가르친다는 것은 조선인의 사고에 맞는 것이기도 했다. 또한 언문을 가르친다는 것은 조선인들에게는 매우 새로운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양반들은 언문이란 여자들이나 하는 글로 여기며 큰 가치가 없는 문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이미 조선인의 언문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있었기에 학당에서는 매 학년 학생들에게 언문을 필수로 가르쳤다. 그렇기 때문에 주시경 같은 위대한 한글학자가 배재학당에서 배출될 수 있었다.

셋째, 미술과 노래 부르기 같은 과목이 선교사들의 부인들에 의해서 교육된 것이다. 이는 조선에서는 처음으로 가르치는 과목들이었다. 노블의 부인은 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며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오늘 아침은 조선 학생들에게 음악 기초를 가르치기 시작한 둘째 날이다. 우리 반의 학생들은 모두 여덟 명으로, 거의가 나이 든 학생들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노래 부르는 법을 알게 되면 좋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 수업이 점점 커져서 나중에는 학교 전체가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될 것이다.

조선 사람들은 노래 부르는 법을 모른다. 이들에게 노래한다는 것은 일종의 음정 없는 콧노래다. 이들은 같은 방법으로 공부도 하고, 글도 읽는다. 처음에는 그들이 음계에 맞춰 노래하고자 애쓰는 것을 듣는 것은 아주 우스꽝스러웠다. 그들은 목소리를 낮게 조절할 줄 몰랐다. 하지만 오늘 아침에는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다. 집에서 아이들만 가르치다가 이렇게 다 큰 남자들을 가르친다는 것이 좀 낯설었지만, 이들은 배움에 커다란 열의를 갖고 있다. 어제와 오늘 학교에서 노래를 가르치기 위해 반주를 했는데 아마도 앞으로 예배 연습을 위해서 매일 아침 학교에 가서 반주를 해야 할 것 같다.”1) <계속>

[미주]
1) 매티 윌콕스 노블, 『노블일지 1892-1934』, p. 56. 1893년 5월 17일 일기

김낙환 박사(아펜젤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전 기독교대한감리회 교육국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