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만민공동회(萬民公同會)와 배재학당
독립협회가 주최한 민중대회로서 1898년 3월 10일 종로에서 약 1만 명의 서울 시민이 참여하여 개최됐는데, 이를 만민공동회라 한다. 구한말에 2년 반에 걸친 독립협회의 자주 독립운동의 절정은 이 운동의 후반기에 전개된 만민공동회였던 것이다.
이 운동은 러시아와 일본의 조선에 대한 침략 시도와 이권침탈에 대한 사전 분쇄 및 자주자강을 위한 내정개혁에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조선 최초의 민중운동이었다. 외세와 결탁한 집권보수 세력이 결국 독립협회 간부들을 기습적으로 체포하고, 1898년 12월 25일 독립협회를 강제로 해산함으로 강력하고 과감한 내정개혁을 통한 조국의 완전 자주독립(自主獨立)과 부국강병(富國强兵)의 꿈은 사라지고 말았으나, 민중의 힘을 동원하여 조국의 독립을 확보하려 했던 독립협회의 조직력과 그 투쟁력은 높이 평가할 만한 것이다.
즉, 그들은 당시의 집권자들이 국가의 운명이나 부국강병보다는 권력의 유지와 기득권의 수호에 더 큰 관심이 있었다고 본 것이다. 그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분석했다. 이러한 집권자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한 국가의 앞날은 암담하였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국가의 자주독립은 이들의 숙청과 추방에 있다고 보고, 민중을 이런 정치적 목적을 위해 동원하고 조직하게 된 것이다.
당시의 부정부패한 관리들은 그들을 규탄하는 민중과 그 지도자들을 억압하기 위해 국가의 소중한 이권을 흥정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들은 민중을 탄압하기 위해 외세에 도움을 청했고, 외세는 이처럼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곧, 국가 내부의 문제가 더 컸던 것이다.
이 만민공동회에 배재학당 교사들과 학생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구국 운동에 앞장섰다. 서재필의 발상으로 시작된 최초의 만민공동회는 앞서 언급했듯 1898년 3월 10일 오후 2시에 종로에서 약 만 명에 가까운 민중들이 모여 처음부터 성황리에 진행되었다.1)
이승만은 자기 몸의 위험을 무릅쓰고 분개하며 주먹을 불끈 쥐고 가두연설을 하였다. 그는 모든 민중을 향하여 ‘여러분 우리 독립당의 간부들이 경무청에 갇히었습니다’라고 외쳤다. 이승만은 정당한 새 나라가 요구하는 정치와 간신배들의 모략을 폭로하여 열화와 같이 군중을 감화시키고 격분시켰다. 수만 명의 군중은 평리원, 지금의 고등법원 앞으로 몰려가서 독립당 동지 17명을 내어놓으라고 소리를 쳤다. 이것이 만민공동회라는 것이다.3) <계속>
[미주]
1) 윤치호, 〈독립협회의 활동〉, 『동광, 제26호』, 1931. 10. p. 35-36.
2) 『The Independent』, March. 12th. 1898. 〈People mass meeting〉
3) 김세한, 『배재사』, p. 111.
김낙환 박사(아펜젤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전 기독교대한감리회 교육국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