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재’는 곧 ‘배양영재(培養英材, 유용한 인재를 기른다)’라는 뜻이다. 여기서는 고종(高宗, 1852~1919)이 친히 ‘배재학당’이라는 교명을 지어 하사한 때를 1886년 6월 8일이라고 적고 있다. 하지만 아펜젤러의 일기에는 이와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그는 외무아문을 통해 학교의 이름과 이를 새긴 현판이 전달된 것은 ‘1887년 2월 21일’이라고 적고 있다. 따라서 이 부분은 엄밀한 자료 고증이 필요한 대목이 아닌가 여겨진다.
“오늘 우리 선교부의 학교 이름을 국왕으로부터 하사받았는데 외무대신을 통해 내게 전달되었다. 그것은 배재학당(培材學堂), 즉 유용한 사람을 기르는 곳(Hall for Rearing Useful Men)이었다. 오늘 외아문의 김씨와 통역관이 한문으로 쓰여진 커다란 이름의 현판을 가지고 왔다. 내가 이해하는 한 이것은 정부가 우리를 인정하는 것이고, 우리가 이제까지 갖지 못했던 것을 얻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우리 학교는 관립학교(官立學校)는 아니더라도, 사립학교(私立學校)라기보다 공립학교(公立學校)인 것이다.”2)
“지난 8일 나는 공식적으로 학교를 다시 시작하였다. 처음엔 두 명으로 시작하였는데, 그 중 한 명은 내가 쌀을 주었는데 이튿날 떠나버렸다. 두 명이 새로 와서 세 명이 출석하였다. 종교는 가르치는 척도 할 수 없다. 오로지 영어만 가르칠 뿐이다. 하루에 한 시간 가르친다.”3)
그리고 알렌의 「외교사연표(1904)」에 정리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독판 재임 표에 보더라도, 김윤식이 편액을 전달한 날로 주장되는 1886년 6월 8일 당시에는 서상우(徐相雨)가 서리독판(署理督辦)을 지내고 있었으며, 정작 김윤식 자신은 1886년 9월 1일 이후부터 1887년 7월 22일까지 독판의 자리에 머문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계속>
[미주]
1) 감세한, 배재사, p. 57~58
2) Appenzeller, 1887년 2월 1일 자, 일기
3) Appenzeller, 1886년 6월 16일 자, 일기
김낙환 박사(아펜젤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전 기독교대한감리회 교육국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