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협성회(協成會)

1. 협성회의 탄생

협성회는 서재필이 배재에서 강의를 맡으면서 학생들에게 외국 학생들의 자치활동을 소개함으로써 태동하기 시작하여, 1896년 11월 30일 조직되었다.1) 의회 민주주의의 꿈을 안고 1895년 말 귀국한 서재필은 우선 아펜젤러의 집에 기숙하면서 배재학당에서 주당 2시간씩 강의를 했다. 그는 전제군주제 아래서 살아온 조선의 학생들에게 의회 규칙과 서구문화, 그리고 입헌정치를 가르치기 시작했다.2)

중추원 고문직을 맡고 있었던 서재필 박사는 장차 배재학당 학생들을 중추원 의관으로 삼고 민주주의 국가를 만들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학생들에게 회의 진행법을 가르치며 매주 토요일 학생 토론회를 열어 지도했다. 서재필은 처음으로 13명의 회원을 모아, 마치 모의국회와 같은 형태의 협성회를 발족시켰다. 이승만, 양홍묵, 노병선, 주시경, 윤창열, 민찬호, 김연근, 김혁수, 이익채, 임인호 같은 사람들이 첫 협성회의 회원들이다.

왼쪽부터 1898년 발간된 협성회회보 제1권 1호, 1896년 발간된 독립신문 초판
▲왼쪽부터 1898년 발간된 협성회회보 제1권 1호, 1896년 발간된 독립신문 초판
이 회는 먼저 회의를 할 줄 모르던 학생들에게 처음부터 동의(同議)니, 개의(改議)니, 재청(再請)이니 하는 등의 회의법의 기초부터 가르치기 시작했다.3) 그리고 점차 교실 밖에서의 사회교육 과정으로 학생들에게 인기를 얻게 되었다. 처음에 이 회를 조직할 때는 회원이 겨우 10여 명으로 시작하였으나, 일 년이 지난 다음부터는 200여 명의 회원으로 급증했다.4)

협성회의 목적은 당시의 학생회답게 충군(忠君) 애국적(愛國的)이요, 계몽주의(啓蒙主義)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런즉 우리 학도 된 사람들은 이러하신 셩의를 밧드사 무론 어느 학교 학도하고 맛당히 다 각기 동량재를 긔약하고 송부를 힘쓰되 첫째 충군, 애국지심들을 굿게 세워 의긔와 용맹을 길러야 할지라. 또 우리가 공부하는 동안에 서로 권면하고 서로 책션하야 마음을 합하고 힘을 갓치하야 국가에 이럿트시 아육하시는 셩의를 만 분지 일이라도 도모하여야 할찌니라. 이거슨 곳 우리 협성회의 셜립의 본의라.

우리회는 곳 학문으로 모인 회라, 서로 권면하야 학문을 힘쓰고 유익한 일이 잇스면 서로 권하고 허물이 잇으면 서로 경책하야 동창지의를 친밀하게 직혀 일심으로 공부하야 일후에 만분지 일이나 국가의 배향하는 은혜를 도모하자는 쥬의요, 또한 우리 젼국동포 형 들을 위하야 이회를 셜립한 것이라. 우리 배눈데로 유익한 말이 잇으면 젼국동포의게 갓치 알게 하고 또한 우리의 적은 졍성으로 젼국 동포를 권면하야 가자는 주의라.”5)

이상의 논설을 살펴볼 때 협성회의 설립목적을 종합하면, 첫째 학생들에게 충군애국(忠君愛國)하는 마음을 기르게 하고, 둘째 배재 학생들을 비롯한 전국 학생들과 친목 내지 동창(同窓)의식을 배양하게 하며, 셋째 학생으로서의 학구열과 학풍의 진작(振作)에 힘쓰며, 넷째 전국 동포를 계몽하는 것 등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바람직한 학생회로 평가된다.

만민공동회 개최 모습
▲만민공동회 개최 모습
협성회는 매주 토요일 오후 2시에 배재학당에서 토론회(討論會)를 개최했다. 이 토론회는 일반에게도 공개되었다. 회원 자격도 개방하여 방청객이 협성회의 회원이 되기 원할 때는 그들을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배재학당 학생들과 일반 학생은 정회원(會員)으로, 그 밖의 사람들은 찬성원(贊成員)으로 입회시켰다.6)

협성회의 토론회는 그 주제의 다양성으로도 유명하고 장안의 인기였다. 토론회를 통하여 배재학당의 학생들은 정치적으로도 크게 각성(覺醒)하였고,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로 무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협성회는 만국회의(萬國會議) 통상규칙(通常規則)이라는 소책자를 발간하기도 했다. ‘연설(演說)’이라는 말도 윤치호 박사가 처음으로 만들어낸 말이었다. 토론회는 가편(可便)과 부편(否便)으로 나누고, 각 편에서는 연사를 3명 혹은 4명씩 세워 연제에 대한 상반된 토론을 전개했다. 청중들은 공명한다는 뜻으로 잘한다는 의미의 박수를 쳤고, 변론을 잘하는 쪽이 형식상 승자가 되었다. 박수를 치는 법도 이때부터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토론회가 거듭될수록 대성황을 이루어 운동장은 초만원을 이루었다. 협성회의 토론회가 크게 성공을 이루자, 독립협회도 그 자극을 받아 1898년부터 같은 형식의 토론회를 시작했다.7)

우리나라 최초의 학생회요, 최초의 학생자치단체였던 배재학당의 협성회는 학생들의 자발적 활동단체로서의 의미만 가진 것이 아니라, 당시 강력한 민족 독립운동단체였던 독립협회의 외곽 단체 또는 자매단체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계속> 

[미주]
1) 협성회(協成會) 회보(會報), 제1호, 1898. 01. 01. 논설
2) 윤성렬, 『도포입고 ABC, 갓 쓰고 맨손체조』, p. 155.
3) 조선일보(朝鮮日報) 1943. 12. 02.
4) 윤성열, 『도포입고 ABC 갓 쓰고 맨손체조』 p. 155-157.
5) 협성회(協成會) 회보(會報), 제1호, 1898. 01. 01. 논설
6) 협성회(協成會) 회보(會報), 제7호, 1898. 02. 12. 내보(內報)
7) 윤성렬, 『도포 입고 ABC 갓쓰고 맨손체조』, p. 157.

김낙환 박사(아펜젤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전 기독교대한감리회 교육국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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