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6년 배재학당 동관 신축공사 현장
▲1916년 배재학당 동관 신축공사 현장 ⓒ배재학당역사박물관
라. 처음으로 세워진 서양식 건물

배재학당은 본래 대학교 건물로 건축되었다. 1885년 8월에 설립되어 1887년 11월 본당이 준공되었다. 그리고 1916년 4월에는 동관(東館)이 준공되고, 1923년 3월에는 서관(西館)이 준공되었으며, 1929년 9월에는 새로운 강당을 신축하기 위하여 본당이 철거1)되었다. 그 후에 1933년 5월 대강당이 준공되었는데, 그 소재지는 서울 중구 정동 34-5번지(서소문로11길 19) 일대이다. 그 후 학교는 오랜 세월을 유지해 오다가 정동의 변화와 발전으로 인해 명일동으로 이전하였고, 배재학당 자리에 지금은 배재빌딩이 자리 잡고 있다. 배재대학부(연희전문)는 정동 34-5번지 일대에서 1914년 6월 설치되었으나 1916년 4월 폐지되었다.

1885년에 배재학당이 개설된 이래, 아펜젤러가 학교를 나타낼 때 자주 사용한 표기법은 ‘배재대학(Paichai College)’이었다. 이러한 표현은 1891년 연례회의 보고에서 등장한 이래로 그가 즐겨 사용했던 것이기도 하다. 이것으로 보아 그는 애당초 배재학당을 단순한 초등교육기관이 아닌 대학으로 발전시키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필자는 앞서 이러한 사실을 파울러 감독의 편지를 통하여 언급하였다.

교복을 입은 배재학당 학생들
▲교복을 입은 배재학당 학생들 ⓒ아펜젤러기념사업회
실제로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을 서울대학(Seoul University)으로 발전시키려던 계획을 교섭하기 위해 1898년 그의 뜻을 미국공사관에 전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아펜젤러의 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1902년 아펜젤러가 불의의 익사 사고로 세상을 떠난 이후 제3대 총리교사가 되어 배재학당의 운영을 책임졌던 벙커(Dalzella A. Bunker, 房巨, 1853~1932)는 아펜젤러와 현저히 의견이 달랐던 것인지, 배재학당을 ‘배재고등학교(Paichai High School)’로 칭하길 원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시대 상황이 변하여 기독교와 관련한 대학 설립의 요구가 마침내 표출된 것은 1910년대의 일이었다. 지난 1955년, 창립 70주년 기념으로 정리된 「배재사」에 보면 당시의 형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본과를 마친 다음에 대학부(大學部)로 진학하였다. 본과는 실력에 따라서 3년에 마치기도 하고 5년에 마치기도 하였다. 한국에 장로교와 감리교 양교파의 두 선교사 언더우드 목사와 아펜젤러 목사의 선교사업은 순풍에 돛을 단 것 같이 순조롭게 교회가 일어나고 학교가 시골벽촌까지라도 일어나며 한국의 신교육은 불일 듯 맹렬히 일어나고 초등학교로부터 중등학교가 늘어가며 장차 중학교의 출신 자제들이 진학하고자 하여도 아직 대학의 문이 열리지 않아서 한국에는 대학을 세워야 함이 급무라는 여론이 미국에 있고, 한국에 있어서 미국 북 감리교회에서는 한국의 각 교파 연합대학을 세울 것을 결의하고 이 뜻을 서울에 와 있는 미국 각 교파 선교사연합회 교육위원회에 제의하였다.”2) <계속>

[미주]
1) 본당의 철거는 대단히 안타까운 결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지금은 우리 교육 역사에 귀한 유적이 되었을 것이다.
2) 김세한, 「배재사」, p. 57-58.

김낙환 박사(아펜젤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전 기독교대한감리회 교육국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