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본문
이사야 55장 1–5절
서론
사람은 누구나 빛나기를 원합니다. 어릴 적에는 칭찬과 인정으로 빛나기를 원하고, 성인이 되면 성공과 지위, 돈과 명예로 빛나려 합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은 어떻습니까? 스스로 빛나보려 할수록 더 공허해지고, 잠깐 반짝이던 빛은 어느 순간 꺼져버립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이 말씀은 그냥 “힘내라”는 위로가 아닙니다. 이사야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영화롭게 하시는 자리에 설 수 있는지 아주 구체적으로 가르쳐줍니다.
본론 1
첫째, 목마름을 인정하고 은혜를 사모하는 자를 영화롭게 하신다 (1절)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하나님은 조건 있는 사람을 부르시지 않습니다. 학벌이 높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성격이 강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능력이 있거나 가진 것이 많아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단 하나의 조건, 목마름입니다.
왜 목마름인가? 사람은 본능적으로 갈증을 해갈하려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방향입니다. 세상은 늘 외칩니다. “새로운 것 사라! 사람들의 인정을 더 받아라! 성공해라!” 그러나 그것은 ‘소금물’을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마시면 마실수록 더 목마릅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늘 이 목마름의 방향이 잘못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렘 2: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스스로 웅덩이를 파지만, 그 웅덩이는 결코 물을 가두지 못합니다. ‘웅덩이’를 판다는 것은 하나님 대신 내 방법으로 갈증을 해결하려는 시도입니다.
‘물이 가두어지지 않는 터진 웅덩이’란? 금이 간 웅덩이는 아무리 퍼부어도 물을 담아둘 수 없습니다. 즉, 아무리 애써도 근본적으로 갈증이 해소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결국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모든 자구책은 무너진 웅덩이다!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근본적 만족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갈증의 유일한 해답이 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4:13–14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하나님께 나아오는 목마른 자만이 생수의 강을 마시게 됩니다. 목마름은 은혜의 시작입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은 ‘갈증’을 우리의 약점이 아니라 은혜를 시작하는 통로로 사용하십니다. 목마름이 축복입니다. 갈증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스스로 배부르다 말하는 자는 하나님께 나아오지 않습니다.
계 3:17–18 (라오디게아 교회)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자기 배부름을 말하는 자는 껍데기만 번지르르할 뿐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은 머물지 않습니다.
‘돈 없는 자도 오라’의 역설은 값없이 와서 사라는 것입니다. 왜 사라면서 값이 없습니까?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사 55:1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값은 이미 하나님께서 지불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 잔치의 대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돈 없는 자로’ 와야 합니다.
본론 2
둘째, 헛된 수고를 멈추고 말씀으로 배부름을 구하는 자를 영화롭게 하신다 (2절)
하나님은 질문하십니다.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 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어찌하여(לָמָּה, 라마)”: 강한 질문 → ‘왜 그러느냐? 도대체 이유가 뭐냐?’라는 것입니다. 양식 아닌 것, 즉 먹을 것 같은데 실제로는 ‘빵(레헴)’이 아닙니다. 겉은 빵처럼 보여도 영혼은 못 채우는 것을 위해 은을 달아 준다는 것은 값을 치른다, 무언가 대가를 지불한다는 뜻입니다.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는 배가 부르지 않는 것을 위해 기를 쓰고 땀 흘린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너, 왜 그런 헛된 거래를 하느냐?” 하고 묻는 겁니다.
당시 맥락으로 살펴보면 바벨론 포로 시대 배경은 이스라엘은 하나님 없이도 만족하려 했습니다. 이방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고, 주변 강대국과 동맹을 맺고, 자기 꾀로 스스로를 지키려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걸 ‘양식 아닌 것을 위해 은을 주는 거래’라 하신 겁니다.
오늘날 현실로 풀면 양식 아닌 것은 겉은 배부르게 보이지만 본질은 속 빈 것입니다. 돈이 있으면 안심될 것 같지만, 돈이 있다고 외로움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지위와 타이틀이 높아지면 인정받을 것 같지만, 더 외로워지고 사람 눈치를 더 보게 됩니다. SNS에서 ‘좋아요’ 수백 개를 받아도 공허한 마음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중독적 쾌락은 순간은 달콤해도 끝엔 더 큰 공허가 있고, 죽음밖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왜 ‘은을 달아 준다’고 표현하셨는가? 은은 ‘대가’를 상징합니다. 즉, 우리는 헛된 것에도 값을 지불합니다. 돈으로 지불하고, 건강으로 지불하고, 마음의 평안으로 지불하고, 관계로 지불합니다. 결국 계산해 보면 남는 건 허무입니다.
전도서 2:11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우리의 세상은 헛된 벤딩머신과 같습니다. 돈 넣으면 잠깐은 무언가 나오지만, 영혼의 허기는 안 사라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생수입니다. 값을 이미 하나님이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말씀으로 돌아와라. 그래야 진짜 배부름이 온다는 사실입니다.
본론 3
셋째,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는 자를 영화롭게 하신다 (3절)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왜 ‘듣는다’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가? 하나님은 단순히 정보를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듣는다’는 것은 단순한 청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마음에 받아들이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뜻합니다.
신명기 6:4 “쉐마 이스라엘(이스라엘아 들으라)!”에서 쉐마(שְׁמַע)는 히브리어로 ‘듣는다’는 뜻이지만, 동시에 ‘순종하다’라는 뜻을 포함합니다. 즉, 성경에서 ‘듣는다’는 것은 곧 ‘행한다’입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들을 귀’를 잃은 데서 시작됐습니다. 이스라엘은 늘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지만,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듣지 않으니 삶이 바뀌지 않았고, 결국 멸망했습니다.
왜 ‘듣는 자’를 살리시는가?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듣는 자는 말씀을 통해 죽은 영혼이 살아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생명입니다. 내 계획을 잠깐 멈추고,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귀 기울이고, 하나님의 방향으로 순종하는 것, 그것이 참된 ‘듣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무리를 앞에 두고 자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11:15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계 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왜일까요? 많은 사람이 ‘듣는 듯하지만’ 사실은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듣지 않는 말씀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본론 4
넷째, 메시아를 붙잡는 자를 영화롭게 하신다 (3–4절)
“내가 너희와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보라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인으로 세웠고…” 하나님은 다윗에게 영원한 왕권을 약속하셨습니다.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란 무엇인가?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영원한 언약’을 다시 일깨우십니다. 그것은 바로 다윗에게 주셨던 다윗 언약입니다. ‘다윗 언약 → 메시아 언약’으로 연결되는 이유는 다윗의 왕권은 잠시였지만, 메시아의 왕권은 영원합니다.
다윗은 한 나라의 왕이었지만, 메시아는 만민의 증인, 만민의 인도자, 만민의 명령자로 세워지십니다. “보라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인으로 세웠고…” 이사야 11:1–2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메시아는 다윗의 뿌리이자 다윗의 자손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공의와 평강으로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그분은 ‘만민의 증인·인도자·명령자’이십니다. 증인(Witness)은 진리를 밝히 드러내고,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선포하신 분이십니다. 인도자(Leader)는 길 잃은 양들을 인도하시며, 생명의 길로 이끄십니다. 명령자(Commander)로서 그분은 권세 있는 왕으로, 열방을 다스리십니다.
우리에게 메시아, 즉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영광이 없습니다. 다윗 언약의 핵심은 메시아이고, 우리 신앙의 핵심도 메시아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종교적 열심, 도덕적 선행으로 하나님께 인정받으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영광은 오직 그리스도를 붙잡는 자에게만 임합니다. 요 14: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요 15:5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결론
왜 6–9절이 결론인가?
1–5절은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초대장’입니다. 그러나 6–9절은 그 은혜가 막연한 위로로 끝나지 않도록 반드시 찾고(Seek), 부르고(Call), 돌아오라(Return) 하는 영적 결단으로 이어집니다. 즉, 하나님이 너를 영화롭게 하시겠다는 약속은 ‘찾고, 돌이키고, 순종하는 자’를 통해 현실이 됩니다.
지금 찾지 않으면 영광은 붙잡을 수 없다 (6절)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은혜는 영원히 열려 있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기회는 ‘만날 만한 때’가 있습니다.
돌아오는 자만이 하나님이 영화롭게 하시는 자리에 선다 (7절)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길을 버린다’는 것은 잘못된 삶의 방향을 멈춘다는 뜻입니다. ‘생각을 버린다’는 것은 고집과 자기의 의를 내려놓는다는 뜻입니다. 은혜를 막는 가장 큰 방해물은 내 방식, 내 고집입니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내 마음의 갈증을 헛된 것으로 채우려 했던 저의 연약함을 고백합니다. 돈이면 될 줄 알았고, 인정과 칭찬이면 살 것 같았고, 순간의 쾌락으로라도 허기를 달래려 했지만 스스로 판 웅덩이는 늘 금이 가서 물을 담지 못했습니다. 주님, 이제는 허무한 웅덩이를 버리고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님께로 나아가게 하소서. 주님만이 내 영혼의 샘물이 되심을 믿습니다. 나의 생각과 방법을 내려놓고, 주님이 주시는 값없는 생수를 마시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핵심 메시지
스스로 판 웅덩이는 결코 내 갈증을 채우지 못합니다. 예수님만이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생수의 근원이십니다. 그분께 나아올 때 내 영혼은 진짜 배부름을 얻습니다.
최원호 목사 (서울 상봉동 은혜제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