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재학당 학생 수가 늘어나자 1887년 교사를 신축하는 모습. 아펜젤러(왼쪽)가 감독하고 있다.
▲배재학당 학생 수가 늘어나자 1887년 교사를 신축하는 모습. 아펜젤러(왼쪽)가 감독하고 있다.
5. 조선에서 아펜젤러의 선교 활동

아펜젤러는 대단한 활동가였다. 그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그의 동료들은 그가 사십 대가 되었을 때 이미 늙은 사람처럼 보였다고 한다. 27살에 조선에 와서 44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까지 그의 정열적인 선교 활동은 한마디로 표현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아펜젤러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그의 동료들은 아펜젤러의 활동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말하고 있다.

첫째로 그는 교육가로서 배재학당을 설립하였다. 아펜젤러가 조선에서 행한 사역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활동은 바로 배재학당의 설립을 통한 선교교육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1885년 학당을 시작하고, 그 다음해가 되는 1886년 감리교회 연례보고서에서 아펜젤러는 다음과 같은 학당의 형편을 보고하고 있다.

“일종의 전초전으로 우리 선교부는 6월 8일 학교를 시작1)해서 7월 2일 첫 학기를 끝냈는데 이 동안에 등록한 학생은 6명입니다. 오래지 않아 한 사람은 이 나라의 상투적인 핑계인 시골에 볼일이 있어서 나가 버렸고, 또 다른 학생은 더운 6월에 새 언어를 배우기가 힘들다고 떠나 버렸고, 또 한 명은 가족 중에 초상이 나서 등교할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학교는 1886년 9월 1일 단 한 명이 등교한 채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빈자리는 자원하여 오겠다는 학생들로 일부가 채워졌습니다.

10월 6일 현재 20명 재적에 18명이 출석하고 있으며, 거의 매일 입학 신청을 내는 학생들로 끊이지 않습니다. 최소한 연말까지는 학교가 붐빌 것이라고 믿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2)

1887년 연례 보고서에 따르면 1886년 단 한 명의 등록으로 새 학기를 시작한 학당은 그해 11월 6일 32명에 이르렀고, 1887년 6월 24일 방학을 할 때는 63명이 등록을 하였는데, 당시 재적 43명에 실제로 출석하는 학생들이 38명이었다고 보고하고 있다.3)

둘째로 그는 목회자로서 정동교회를 설립하였다. 1888년 연례 보고서에서 역사적인 정동교회 설립을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9월에 우리는 작은 집 한 채를 샀는데 이것이 벧엘 예배당이다. 우리가 그 집을 그런 용도로 사용하는 것에 양해해 주기를 바란다. 이곳으로 구도자들이 모이고 일요일에는 종교적인 예배가 열린다. 10월 9일에 나는 한국인을 위한 최초의 공중예배를 인도했다. 나를 제외하고 4명이 참석했으며, 그 모임은 우리 모두에게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다음 주일 날 나는 권서인의 아내에게 세례를 주었는데 28세의 젊은 부인이다. 그는 한국에서 개신교 선교사에 의해 세례받은 최초의 여성이다. 그와 그의 남편은 우리의 찬양을 받으실 주를 믿는 신자요, 다른 사람들의 가슴 속에 하나님의 왕국을 앞당기기 위하여 일하고 있다.”4)

셋째로 그는 성서 번역가로서 성서 번역위원회의 회원으로 조선의 성경을 번역하여 만드는 일에 적극 참여하였다. 1894년 4월 11일 수요일, 서울에서 작성된 그의 일기를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일주일 전에 성서번역위원회(Board of official Translators of Bible)가 언더우드의 집에서 모임을 가졌다. 위원들 모두가 참석했다. 그 명단은 회장에 언더우드, 게일, 아펜젤러 목사, 스크랜턴, 마크 내피어 트롭롤(Mark Napier Trollope)5)이었다. 큰 사업에 착수해서 언더우드와 스크랜턴과 내가 마태복음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까지 앞의 첫 세장에 신경을 집중하였는데 용어 문제를 가지고 토론을 벌이고 있다. 각기 의견이 다른데 다른 새로운 합일점으로 할 수 있는지를 논의 중이다. 텬주가 합일점인데, 한국어로는 하느님이다. 작업은 느리지만 그래도 꽤 진전이 있었다. 대부분 동사로 끝맺는 어미를 쓰려고 토론 중이다. 한국어가 어렵지만 이 문제는 정말 어렵다.”6)

아펜젤러 선교사(좌)와 조원시 선교사(우)
▲아펜젤러 선교사(좌)와 조원시 선교사(우)
함께 사역을 하며 아펜젤러를 옆에서 지켜본 조원시(George Heber Jones)7)는 아펜젤러 사후에 추모사에서 다음과 같이 아펜젤러를 회상하고 있다.

“그는 문예에도 재질이 있어서 한국어로 글을 썼고 성경을 번역하는 일을 도왔다. 그는 공공사회 단체에도 많이 참여하여 연합교회, 한국성서공회, 사회서울연합회, 공동묘지연합회, 아시아학회 한국지부 등과 같은 단체의 발기 위원이 되었다. 사실상 그는 점차로 이 사회의 일상생활에서 중요한 인물이 되었으며, 조선 사회의 모든 면에 호흡을 같이한 인물이 되었던 것이다.”8) <계속>

[미주]
1) 1885년 6월 8일을 말한다. 이는 조선에서 가장 처음으로 세워진 근대식 학당이었다.

2) 「미감리교선교부 1886년 연례보고서」 p. 267. 이 보고서는 당시 부감리사로 있던 아펜젤러가 쓴 것이다.

3) 「미감리교선교부 1887년 연례보고서」, 이만열의 책 『아펜젤러』에서 재인용함, p. 476.

4) 유동식, 『정동제일교회의 역사 1885-1990』, p. 53.

5) 트롭롤(1862~1939)은 영국 출신의 성공회 주교로 조선의 3대 교구장을 역임했다. 1891년 3월 19일 조선에 들어와 다른 교파 선교사들과 한글 성서 번역에 참여했다. 귀국 후에도 다방면으로 조선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다가 1910년 2대 주교인 터너가 사망한 후에 후임자가 되었다. 그는 1890년 7월 1일부터 영문 잡지인 『모닝 캄(Morning Calm)』을 발간하였다.

6) 아펜젤러, 『자유와 빛으로 II』, p. 138.

7) 조원시 목사(1867. 8. 14~1919. 5. 11)는 1867년 8월 14일 미국 뉴욕주 모호크(Mohawk)에서 출생했다. 아펜젤러 목사를 이은 내리교회 초창기의 뛰어난 지도자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1888년 5월에 약관 20세의 나이로 미북감리교회 선교사로 1888년 5월 14일 제물포에 내한하여 약 5년간 배재학당에서 교편도 잡고 문서출판 사업도 하다가 1892년부터 내리교회를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펼쳤다.

조원시 목사는 ‘인천, 강화, 남양, 황해도 선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선교 초기 감리교회의 대표적인 ‘학자 선교사’다. 그가 내리교회를 선교 거점으로 삼아 선교활동을 펼친 1903년까지는 인천 강화지역에 가장 왕성한 감리교 운동이 일어난 시기였다. 강화 교항교회, 홍의교회, 고비교회, 담방리교회(현 만수교회), 부평 굴재교회, 하리교회, 연압읍교회 등 수많은 감리교회가 이 당시에 설립됐다. 아펜젤러가 선교의 터를 닦았다면 조원시 목사는 그 터 위에 전도와 교육 전반에 걸쳐 괄목할만한 업적을 쌓은 내리의 아버지라 할 만한 분이다.

그는 1892년에 조선 최초 초등교육기관인 영화학교를 개설했고 강화, 연안, 해주, 남양 지방에 전도를 시작했다. 1894년에는 한국인 자력으로 교회당을 건축하여 봉헌했으며, 조선 최초의 신학회를 조직하여 이동신학교를 개설했고, 1901년 성탄절에는 내동 현 위치에 십자가형 벽돌 예배당을 지었다. 교인 다수가 하와이로 이민함에 따라 홍승하 전도사를 하와이에 파송하기도 했다.

조원시 목사는 문서 선교를 통해 인쇄 출판 분야에서도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1892년 루이스 로쓰와일러(Louis C. Rothweiler)와 공동으로 조선 최초의 찬송가를 편찬했으며, 1892년 창간된 조선 최초의 잡지 ‘코리안 리포지터리’(The Korean Repository)의 발간과 편집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서울 YMCA 창립에 공헌했으며, 1905년에는 초대 신학당(현 감신대) 당장에 취임하였다. 조원시 목사는 1909년 5월 노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가서도 조선 선교를 위해 많은 일을 하다가 1919년 5월 11일 52세의 나이로 플로리다의 마이애미에서 별세했다.

8) 송길섭, 『배재 백년사』 p. 395.

김낙환 박사(아펜젤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전 기독교대한감리회 교육국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