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펜젤러가 주축이 되어 미국인 개척자들이 구체화시켰던 교육은 조선의 전통적인 교육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모든 면에서 조선인의 기질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지만, 그것은 곧 조선인의 절실한 필요를 채워 주고 조선의 정신적, 사회적, 정치적 질병들을 치료하기 시작하였다.
그 교육은 학생들에게 생각하라고 가르쳤다. 그것은 훈련의 강조점을 암기에서 판단으로 변화시켰다. 그것은 시력을 통찰력으로 변화시켰다. 그것은 학생들에게 원인을 물어보라고 가르쳤으며 인과관계라는 영원한 법칙을 체득하라고 가르쳤다. 그것은 남자다운 정신과 기사도에 역점을 두었다. 집에서 여인들과 아이들도 끼니를 잇지 못하는 하인들을 억압하거나 괴롭히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것은 근면은 존중할 만한 것이며, 정직한 노동, 심지어 육체노동까지도 보수를 받고 존중받을 가치가 있음을 가르쳤다.
이러한 교육은 필연적으로 언젠가는 만연되어 있는 귀신숭배의 전 체계를 무너뜨리고 양반의 전 특권과 여성의 노예 상태와 저열한 조상숭배를 없애고 우습게 만들어 버리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공적인 법에 의하지 않고 사람들을 지배하며 일천이백만의 백성들을 짓누르면서 일인 체제를 위하여 봉사하는 정부, 그 정부라고 불리어지는 부정부패의 거대한 건물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1)
실제로 아펜젤러의 제자들은 조선 사회의 반봉건적, 반침략을 주도하는 역동적인 힘을 발휘하게 되었다.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慶運宮)으로 환어(還御)하는 고종을 환영하는 대열을 만들고, 독립문 정초식에 참석하여 청년운동을 모색하며, 협성회(協成會), 독립협회(獨立協會)에 직접 가담하였으며,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의 한 주동 세력으로 등장하여 일본과 보부상들 세력으로부터 주목과 위협을 받기까지 하였다.2)
이렇게 학생들이 활발하게 된 이면에는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과 윤치호와 같은 분들의 가르침도 간과(看過)해서는 안 되지만, 그 보다 우선적으로 아펜젤러의 새로운 서구적 교육, 다시 말하면 인간 중심의 기독교적인 교육의 영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계속>
[미주]
1) William Elliot Griffis, 『A Modern Pioneer In Korea』. p. 178-179. 이만열의 「아펜젤러」에서 재인용 p. 488
2) 위의 책, p. 489.
김낙환 박사(아펜젤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전 기독교대한감리회 교육국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