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재학당은 1890년 영문으로 된 학칙을 제정, 한문으로 번역해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실 구한말(舊韓末)에 학부(學府)에도 한학(漢學) 교육에 관한 식목도감(式目都監)이라는 학규가 있기는 하였으나 배재학당의 신교육 학칙과는 그 내용이 전혀 달랐다.
학칙의 주요 내용은 수업료는 매월 3냥씩 내며, 수업은 오전 8시 15분부터 11시 30분과 오후 1시부터 2시에 하고, 수업이 끝날 때는 종을 울린다는 것 등이다. 출입을 마음대로 하면 벌하고, 술, 노름, 음란한 책을 읽는 것을 금하고, 파손한 용기는 변상케 했다. 도강(都講, 시험)은 연 2회로 하고, 학과는 3종 혹은 4~5종으로 나누어 1백 점 만점으로 하며, 공과점표(工課點票, 성적표)를 만들어 학부모나 추천인에게 보내도록 했다.
특히 1899년에는 학당 안에 기숙사가 설립되었다. 기숙사는 전 배재고등학교 수위실 뒤 남관 자리에 있었는데, 1백여 평의 기와집을 학생들의 기숙사로 활용하였다. 방은 모두 12개였고 한방에 2명씩 사용했다.
기숙사 규칙은 비교적 엄했다. 출입에는 반드시 허가를 얻어야 하고, 밤 10시에는 등불을 끄게 했으며, 공부할 때는 친구의 방문도 허락되지 않았다. 또 기숙사 안에서라도 범법(犯法)을 하면 사법당국에 넘기도록 했다.
학생들에게는 학자금을 벌 수 있는 일자리를 만들어 주었으며, 허물이 있으면 출학이나 정학을 명할 수 있었다. 당시 이와 같은 학칙은 상투를 틀고 장죽을 물고 다니던 학생들에게는 까다로운 제약이었다. 그래서 아펜젤러는 학칙 준수에 있어 평소에 신축성을 두고 학생들의 학당 생활을 점차적으로 바로 잡아 나갔다.
학칙에 성경강독이나 기도회가 명시되지 않은 것은 아직도 아펜젤러 목사의 본 목적인 기독교 전도에 신중을 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때까지 학생들의 기독교에 대한 반응이 신통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1) <계속>
[미주]
1) 윤성렬, 『도포입고 ABC 갓쓰고 맨손체조』, (서울, 학민사, 2004), p. 29.
김낙환 박사(아펜젤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전 기독교대한감리회 교육국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