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재학당 학생들(1889년)
▲배재학당 학생들(1889년)

4) 영어(英語) 독본(讀本) 시간

아펜젤러 당장(堂長)은 덮어놓고 좋다거나 요령(要領)없이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옳고 그른 것을 가릴 때는 엄격하고 철저했던 것이다. 이익채1)는 ‘배재학당 50년 좌담회’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들이 영어를 배우고 몸소 겪어본 일인데 독본(讀本)을 가르치다가도 그 이야기 속에 옳고 그른 것이 있는 것을 보면 자신의 몸을 꿋꿋이 내밀고, 힘을 주어 형용하며 이야기하는데 우리들의 마음이 그를 따라가고, 그가 격분(激忿)할 때면 박력(迫力)이 있어 보여, 우리에게도 의협심(義俠心)이 일어났던 것이다.”2)

아펜젤러는 철저한 기독교 신자(信者)였다. 자기의 신앙에 무슨 일이든지 조금만 틀리면 절대로 하지 않았으며, 신앙(信仰)을 지키는 것을 생명(生命)보다도 더 아끼고 중히 여겼던 것이다.

호머 헐버트가 왕립육영공원에서 학생들에게 대수학을 가르치고 있다. 당시 선교사가 진행하는 수업은 모두 영어로 진행됐다.
▲호머 헐버트가 왕립육영공원에서 학생들에게 대수학을 가르치고 있다. 당시 선교사가 진행하는 수업은 모두 영어로 진행됐다.

아펜젤러 당장(堂長)은 덮어놓고 비폭력적(非暴力的)이거나 무저항주의(無抵抗主義)는 아니었다. 필요에 따라서 옳고 그른 일에 있어서 저항력이 있었고 사양하지 않았다. 그는 갑오(甲午), 을미(乙未), 병신(丙申)년에 당시의 한국의 정치(政治) 문제를 들어서 학생을 선동하는 일은 절대 없었다. 그러나 자신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을 할 때에는 힘있게 주장하는 동시에 학생들의 가두 연설이나 교내 연설을 간접(間接)으로 많이 도왔다.

정치범에 대하여서는 치외법권(治外法權)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피신(避身)도 시켜주었다. 어떤 정치범이든 와서 피신을 하면 그대로 두었던 것이다. 이는 당시 청년 이승만이 만민공동회 사건으로 피해 달아날 때에 그를 보호하여 준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3). 그러나 어떤 경우는 옳지 못한 피신이라 하여 거절하기도 하였다.

아펜젤러는 동료들과 가까웠으며, 아이들을 사랑했고, 책임감이 강한 인물이었다. 또 교육가로서, 선교사로서 전문성을 지닌 유능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계속>

[미주]
1) 이익채는 배재학당 출신으로 1898년 제 4차 협성회 임원회의 회장이었다. 후에 러시아 공사를 역임하였다.
2) 조선일보(朝鮮日報) 1934. 11. 27. 기사
3) 조선일보(朝鮮日報) 1934. 11. 27. 기사, 『배재 80년사』에서 재인용 p. 144.

김낙환 박사(아펜젤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전 기독교대한감리회 교육국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