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이야기는 이익채 씨가 러시아 공사로 떠날 때 들려준 이야기로, 조선일보 1934년 11월 29일 자에 실렸다.
“멀리 가는 사람이 귀중품을 가지고 갈 수 없고 갖다가 맡기려니 마땅한 곳이 없어 생각하다가 아펜젤러 당장은 진실로 믿음직하기에 맡기게 되는데 아펜젤러는 그에게 물품 보관한다는 보관 증서를 써주게 되었다. 물건을 맡기는 이는 이것이 무슨 쓸데없는 수고냐 하며 사양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아펜젤러는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 오늘저녁에 당장 나의 영혼을 데리고 가시면, 나중에 무엇으로 신빙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시면서 이 표를 받는 이외에 어디다가 내가 간직하는지도 당신이 알아 두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미션 세이프티」에 보관한다고 하셨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후에 3년이 지나 1902년에 아펜젤러 당장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는데 그 소식과 함께 이화학당의 당장인 미스 조세핀(Miss Josephine)이 내가 아펜젤러에게 맡긴 그 물건을 보관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것이다.”1)
조선의 도덕은 어른의 말, 혹은 지도자의 말이면 대게는 그냥 믿는 것이 상례이다. 보관증, 혹은 영수증은 서로 모르는 사람이거나 서로 불신할 때 교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많은 조선 사람에게는 어떤 일이든지 대강하거나 대충하려는 습성이 있었다. 그러나 죽음 이후 알려진 아펜젤러의 분명하고 정확한 모습은 조선인들에게 큰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6) 상놈이라도 정중하게
1887년 봄에만 해도 배재학당에 다니던 학생 중에서 아펜젤러가 마련한 집에서 살고 있던 이들이 있었다. 이들 중에는 집이 시골이라 어쩔 수 없는 이들도 있었으나, 집에 먹을 것이 없어 머물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각각의 형편을 알고 있던 아펜젤러는 이들에게 돈을 미리 꾸어주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들 중 몇몇이 아펜젤러가 집을 비운 사이에 도망가서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1887년 봄, 아펜젤러가 평양을 비롯한 북부 지역 여행을 떠나게 되자 몇몇 학생은 돈을 갚지 않으려고 도망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돌아와서 이를 알게 된 아펜젤러는 스크랜턴의 초병을 시켜 이들을 잡아 오게 하였다. 당시 선교사 집의 초병들도 힘이 있었다. 그는 도망한 학생들을 잡아 왔고 결국 돈을 모두 갚게 되었다. 그러나 아펜젤러는 돈을 갚지 않고 도망하려 했던 학생들이라도 정중하게 대해 주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다는 사실을 믿고 있었다.2)
아펜젤러는 기독교인들의 너그러운 생활 태도, 여성들에 대한 친절한 태도, 그리고 하인들에 대한 관대한 매너를 통하여 기독교의 우월성을 조선인들에게 보이고자 하였던 것이다. <계속>
[미주]
1) 조선일보(朝鮮日報) 1934. 11. 29. 기사
2) 김진형, 『한국 초기 선교 90 장면』, p, 40.
김낙환 박사(아펜젤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전 기독교대한감리회 교육국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