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병들의 모습은 이러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초병들의 모습은 이러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3) 초병(哨兵)과 아펜젤러

당시에는 기수(초병)1)란 직급의 관리가 있었다. 당시 정부의 높은 직급의 관리들과 부(富)를 가진 사람들은 정부에서 인정한 초병들의 도움을 받았다. 각국의 영사관이나 선교사들 주거 지역에도 이 초병들이 있어서 조선에 주재하는 외국인들을 보호하였다고 한다. 이 초병들은 관(官)에 속한 잡역부가 아니었으며 일종의 경찰의 개념을 가진 관리였는데, 비교적 높은 계급의 군인이었으며, 그 수(數)는 그리 많지는 않았다.

그들은 개인적으로 제한된 권력을 가지고 있어서 자신이 보호해야 할 사람들을 예의를 다해 충성스럽게 보호하였다. 그리고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반인들에게는 비교적 우호적으로 인식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규약에 따라 자신을 고용한 사람들에게 충실하였다. 특히 동학운동(東學運動)이 있었던 초기 선교 기간에 신변의 보호를 위하여 그들은 정말로 필요한 존재들이었다고 한다. 다음 글은 배재학당에서 함께 교사로 생활했던 선교사 노블(W.A. Noble)이 기억하는 초병과 아펜젤러의 모습이다.

“나는 특히 아펜젤러의 거주지 문에 앉아 있던 기수를 기억한다. 상투에서 나막신에 이르기까지 예의범절과 충성심이 배어 나왔다. 그러나 그 초병은 도덕 윤리에 대한 과도한 열망으로 차 있지는 않았기에 이웃 선교사들이 그의 고용인 아펜젤러에게 초병들에게는 흔한 일이었던 잦은 음주습관에 대해 주의를 주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아펜젤러는 그를 두둔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 이해가 안 되겠지만 초병은 조금 부족한 면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네. 그러나 감리교인들도 완전(完全)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나.’”2)

최병헌 목사
▲한학자 출신인 최병헌 목사는 한국의 상황 속에서 기독교의 의미와 위치를 밝히려고 노력하는 등 한국적 신학 형성의 선구자였다.

위의 이야기는 아펜젤러가 자신의 아랫사람이나 자신과 관계된 사람들에 대하여 존중하는 마음과 아울러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바로 그 믿음과 흔들리지 않는 기대감이 양반 출신의 뛰어난 사람 최병헌3)이 감리교회의 연회원이 되고, 조선개신교 사상 처음으로 목사안수를 받은 세 사람4) 중의 하나가 되도록 한 것이다. <계속>

[미주]
1) 다른 책에서는 기수(旗手)로도 번역함. 갑오개혁 후에 치안을 담당하는 경무청이 설치되면서 생긴 중간관리 직급이다.

2) 사우어(C.A.Sauer) 엮음, (자료연구회 옮김), 『은자의 나라 문에서』, p. 40.

3) 최병헌[崔炳憲, 1858(철종 9)∼1927], 감리교 목사, 한국적 신학 형성의 선구자. 호는 탁사(濯斯). 충청북도 제천 출생.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고 과거를 준비하던 중 《영환지략 瀛環志略》 등의 서적을 읽고 서양 문화의 발달상과 그 정신적 지주가 기독교임을 알게 되었다. 과거의 부패상에 분노를 느끼고 사회 개혁 운동에 관심을 두던 중 1888년(고종 25) 선교사 존스(Jones, G. H.)에게 우리말을 가르치고 배재학당의 한문 교사가 되면서 선교사들과의 교제를 가졌다. 1893년 세례를 받고 정동교회의 전도사로 활동하는 한편, 성서번역위원 및 독립협회 간부, 제국신문 주필, 신학월보 편집인 등으로 활약하였다. 또한, 《독립신문》·《조션그리스도인회보》·《대한매일신보》·《황성신문》 등에 개화사상 및 정치개혁사상을 역설하는 문필가로서 활동하였다.

1902년 목사안수를 받고 교회를 담임할 수 있고 등단설교(登壇說敎)를 할 수 있는 최초의 목사가 되었다. 정동교회의 창설자인 아펜젤러가 해난사고로 사망하자 곧 담임목사직을 이어받아, 1903년부터 1914년까지 목회 활동을 하였다. 이 기간에는 신학활동에도 몰두하여 《신학월보》에 〈셩산유람긔〉·〈죄도리〉·〈사교고략 四敎考略〉 등의 글을 발표하였다. 또한, YMCA 운동에도 참여하여 종교부위원장 및 전국삼년대회의 대회장으로 활약하였고, 1914년부터 1922년까지 인천·서울 지방의 감리사로서 교회 행정 능력을 발휘하였다. 이 시기에 《만종일련 萬宗一#연16》이 출판되어 1912년에 간행된 《성산명경 聖山明鏡》과 함께 주저로 꼽히게 되었다.

1922년 은퇴 후 감리교 협성신학교 교수로 초빙되어 사망할 때까지 비교종교론과 동양사상을 강의하였다. 해박한 한학지식을 바탕으로 동양의 여러 종교를 이해하였으며, 특히 한국의 상황 속에서 기독교의 의미와 위치를 밝히려고 노력하였다. 그의 신학사상이 지닌 중요성은 한국의 재래종교와 기독교 사상의 접합점을 선구자적으로 모색한 것에 있다.

4) 김창식, 김기범, 최병헌으로 모두 배재학당에서 공부한 분들이다. 김창식[金昌植, 1856(철종 7)∼1929], 기독교 감리교 최초의 목사. 황해도 수안 출신. 16세까지 한문 공부를 하였고 29세까지는 농사와 행상을 하였다. 당시 서양인들이 조선 아이들을 잡아먹는다는 야만성을 확인하기 위하여 선교사 오링거의 집에서 같이 생활하는 가운데 그들로부터 오히려 감화를 받고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다. 그 뒤 오링거와 아펜젤러에게서 마태복음을 비롯한 4복음을 배웠으며, 오링거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1891년에 오링거가 출국하자 이듬해 8월에 선교사 홀과 함께 평양지방에 파송되어 순회 전도를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32년에 걸친 목회의 시작이었다. 평양에서의 선교 활동이 처음에는 순조롭게 진행되다가 1894년에 청일전쟁으로 그곳이 전쟁터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평양을 떠나지 않고 평양 사람들을 돌보며 선교에 힘써 몇 곳에 교회도 세웠다. 그중의 하나가 평양제일교회(후의 남산현교회)였다. 이때 평양 감옥에 투옥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는 등 핍박을 받기도 하였다.

1893년부터 전도사 훈련과 시험을 받아오다가 1901년 5월에 상동교회에서 개최된 감리교연회에서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 뒤 삼화교회·평양제일교회와 신계·연안·운산·덕천·양덕·맹산·영면·회천·원산·제천 지방으로 다니며 순회 전도에 진력하였다. 이렇게 전국을 누비며 각처에 48개 교회를 세웠고, 많은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를 ‘한국의 사도바울’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지방감리사로 임명되어, 1904년부터 1910년까지 평안북도 영변 지방 감리사로, 1912년에는 평양지방 감리사로 시무하다가 1924년에 은퇴하였다.

김기범[金箕範, 1868(고종 5)∼1920], 기독교 감리교 목사. 최초의 한국인 집사목사(세례와 혼례·예배·전도의 거행권만이 부여됨) 중 한 사람이다. 1890년에 기독교에 입교, 1893년부터 전도사가 되어 제물포 지역에서 8년간 전도 사업에 종사하였다. 감리교의 지방회에서 개최하는 신학회(Theological class, 신학교의 전신)에서 목사 안수 과정을 밟고 난 뒤, 1901년 5월 서울 상동교회에서 김창식과 함께 북감리교회의 감독 무어(Moore, H.)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 뒤 황해도 연안 지방에서 순회 전도를 하다가 제물포의 내리교회(內里敎會) 담임목사로 재직하면서 교회재단의 영화학교 교장으로서 교육사업에도 공헌하였다.

김낙환 박사(아펜젤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전 기독교대한감리회 교육국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