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 제물포 중심거리. 왼쪽에 3층 건물로 지어진 대불호텔이 보인다. 하단에는 아펜젤러 선교사의 사인이 표기돼 있다.
▲1896년 제물포 중심거리. 왼쪽에 3층 건물로 지어진 대불호텔이 보인다. 하단에는 아펜젤러 선교사의 사인이 표기돼 있다.
아펜젤러 부부는 1885년 3월 23일 요코하마를 출발하여 고베를 거쳐 3월 28일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배를 갈아타고 3월 31일 부산을 향해 출발한다. 이때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가 합류하였다1). 이로써 장로교와 감리교 개척선교사가 같은 날, 같은 배로 조선을 향하게 된다. 아펜젤러 일행이 탄 배는 4월 2일 아침 부산항에 도착하여 하루를 머물렀는데, 그 사이 아펜젤러 부부는 부산항에 상륙하여 처음으로 조선의 땅을 밟았다.

그리고 다시 1885년 4월 3일 아침, 부산항을 출발하여 남해안과 서해안을 돌아 4월 5일 인천에 도착하였다. 그 이튿날, 아펜젤러는 조선 도착 소식을 다음과 같이 미국에 전했다.

“기뻐해 주십시오. 우리는 안전하게 도착했습니다. 배는 부활주일 오후 3시에 닻을 내렸습니다. 우리는 곧바로 삼판(작은 배)에 옮겨 타 한 시간 노를 저어 해안에 상륙하였습니다. 우리는 바로 서울로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좋다는 충고를 받았습니다. 우리 목적이 여기 머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우리나라 군함이 여기 있어 우리 안전을 지켜주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 계획은 이곳에 우리 거처를 마련하고, 계속할 생각은 아니지만 어학 공부를 시작하면서 길이 열리면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움직여 나가는 것입니다.”2)

아펜젤러는 곧바로 서울로 들어갈 계획이었지만 계획대로 하지 못했다. 갑신정변을 계기로 국내적으로는 개혁, 보수 진영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국제적으로는 청, 일 양국이 군대를 한반도에 파견하여 군사적 충돌이 벌어질 수도 있는 불안한 상황 때문이었다. 인천항에는 두 나라에서 파견한 군함들이 서로 대치 상태에 있어 전투가 벌어질 것 같은 분위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자국민 보호’를 이유로 미국 측에서 보낸 군함 오시피(Ossipee)호도 인천항에 정박해 있었는데, 그 배의 함장 맥글랜시(McGlensy)가 아펜젤러 부부, 특히 그 부인의 입경을 강력하게 만류하고 나섰다3).

게다가 서울에 있는 미국 대리공사 폴크(G. C. Foulk)로부터 정치적 상황이 좋지 않기 때문에 서울에 들어오지 말고 항구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 좋다는 편지까지 받았다4). 모두 아펜젤러 부인의 안전을 우려한 조치들이었다. 아펜젤러 사후 7년이 지난 후인 1909년에 아펜젤러 부인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하였다.

“우리는 경황이 없는 중에 삼판에서 해안가 바위로 발을 내디뎠습니다. 그 순간 수많은 한국인 잡역부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짐을 빼앗듯이 가로채서 우리는 그들을 따라 낡은 대불호텔로 끌려갔습니다. 우리 옆방에는 언더우드 씨와 스커더, 테일러 씨가 있었습니다. 소나무 판자로 만든 침대는 덮개 외에 헝겊 두 장이 깔려 있었습니다. 베개도 시트도 없었습니다. 세면대는 홀 안에 하나, 이곳에 투숙한 손님 모두가 사용하게 되어있었습니다. 한 주일 동안 있으면서 나온 음식을 먹어보려 애를 썼습니다만, 도저히 음식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어서 먹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내가 짐이 되고 있음을 즉각 깨달았습니다. 나만 없었다면 아펜젤러는 서울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맥글렌시 함장은 다른 여인이었더라도 수도에 들어가는 것을 막았을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는 아주 단호했으며 자기 부하들의 생명까지 희생시켜서라도 가련한 내 목숨을 구하려는 열정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맥글렌시 함장이 모든 결정을 내렸고 결국 우리는 두 달 동안 그 나라를 떠나 있어야만 했습니다.”5) <계속>

[미주]
1) 한국 이름은 원두우(元杜尤)이다. 1881년 뉴욕대학교를 거쳐 1884년 뉴브런즈윅 신학교를 졸업했다. 1890년 뉴욕대학교에서 명예신학박사, 1912년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884년 7월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의 임명에 따라 이듬해 감리교 목사인 H. G. 아펜젤러와 함께 한국에 입국했다. 1886년 조선 최초의 고아학교(고아원)를 설립했는데 이 학교가 경신학교의 전신이다. 1887년 9월 새문안교회를 설립했다. 1889년 한국예수교성교서회를 창설하여 문서를 통한 선교 실무를 관장했으며 〈한국어문법〉을 편찬·간행했다. 1897년 〈그리스도 신문〉 창간, 1900년 기독교청년회 조직, 1915년 경신학교에 대학부를 설치하여 연희전문학교의 설립에 바탕이 되었다. 그밖에 세브란스 의학교, 피어선 성경학원, 평양 장로교신학교 등의 설립에 주도 역할을 했으며, 성서번역 사업에도 커다란 기여를 하여 조선 최초로 찬송가를 간행했다. 주요저서로는 〈한영사전〉·〈영한사전〉(1890)·〈한국의 소명 The Call of Korea〉(1908) 등이 있다.
2) 1885년 4월 6일에 쓴 이 편지는 미국 감리교회의 기관지 「The Christian Advocate」에 실렸다. 「The Christian Advocate」, May 28, 1885, p. 348.
3) 오시피호의 함장, 맥글레시는 아펜젤러 부부에게 일본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였다. M.D. Davies, The Missionary Thought and Activity of Henry Gerhard Appenzeller, P. 116-120, 144.
4) 주한 미국 공사 푸트는 갑신정변 직후인 1885년 1월 10일 갑자기 공사직을 사임하고 본국으로 돌아갔고, 대신 해군 무관이던 폴크 대위가 대리 공사로 업무를 보고 있었는데 그도 계급이 위인 맥글레시 함장의 의견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알렌의 일기』, p. 47, 63, 이덕주, 『서울 연회사I』 에서 재인용, p. 48.
5) E.D. Appenzeller, 『First Arrivals in Korea: Mr. Appenzeller』 p. 189. 이덕주, 『서울 연회사I』 에서 재인용, p. 49.

김낙환 박사(아펜젤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전 기독교대한감리회 교육국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