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아펜젤러의 인품(人品)

아펜젤러는 선교 초기부터 열정과 헌신으로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선교사였다. 그는 아침 6시에 한국어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아침 7시 30분부터 8시 사이에 아침 식사를 하였다. 그다음에는 가정예배를 드렸고, 이후 한 시간 동안은 운동을 했다. 9시부터 12시까지는 조선말 선생과 함께 한글을 쓰고 직접 발음해 보았다. 오후 시간에는 집 밖에서 이루어지는 참으로 많은 일에 동참하고 저녁은 독서와 기록에 바쳤다. 아펜젤러에게 책은 말 없는 귀한 친구였다. 아내와 아기 다음으로 그는 서재를 좋아했다. 그가 읽은 책 목록들은 그가 세계의 사상과 진보에 뒤지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1).

“니우자시 주 마테손 신학교(神學校) 시대의 친우 한 사람인 안다손 감독(監督)은 말하기를 ‘아펜젤러 군은 신체가 완건(頑健)하고 두뇌(頭腦)가 자못 명석(明晳)하여 학자의 타입이고 특히 온화(溫和)하고 동정심(同情心)이 많은 사람이었다’라고 하였다.”2) 

아펜젤러 선교사(맨 뒷줄 오른쪽)와 배재학당 초기 학생들
▲아펜젤러 선교사(맨 뒷줄 오른쪽)와 배재학당 초기 학생들

1895년 을미년에 양반 자제들이 배재학당에 입학하고 공부하게 되는데, 학생들은 학교에까지 하인들을 데리고 다니게 되었다.

“배재학당 초창기의 학원3)들은 모두가 도포와 행전 차림에 큰 갓을 쓰고 장죽을 가지고 다녔다.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면 나와서 장죽에 담배를 말아 푹푹 피웠다. 아펜젤러 당장은 한국의 고유전통을 존중하여 흡연을 말리지 않았다. 또 명문자제들은 하인을 데리고 학당에 등교, 운동시간에는 하인들에게 정구를 대신 치게 하였고, 잔심부름을 시키기도 하였다. 당장은 학원들의 하인 대동을 금지토록 간곡히 설득해 얼마 후부터는 이와 같은 풍습은 점차 없어지게 되었다.”4)

아펜젤러는 하인들을 데리고 학당에 나오는 학생들을 불러다가 따로 앉히고, 세계의 문명국에서는 어떻게 산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앞으로는 하인을 데리고 오지 말고 혼자 나오라고 원만하게 말하였다고 한다.

또한 아펜젤러는 1885년에 맥클레이 박사를 돕는 조선선교회의 부감리사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감리사로 선임되고, 후에는 선교회 회계담당자로 사역하였다.

“아펜젤러는 성경 번역위원 중 한 명이었다. 그의 가장 친한 친구로는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가 있는데, 그는 언더우드를 ‘언디’라고 불렀으며 언더우드도 아펜젤러를 ‘아펜’이라는 별명으로 즐겨 불렀다고 한다. 그는 아이들을 좋아하여 주변에 조선 아이들과 같이 있는 것을 즐겼으며, 할 수 있는 한 누구에게나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고 상처 주지 않으려고 하였다. 조선 사람들이 자신의 가족에 대해 감사하고 칭찬하는 것을 듣는 것보다 그에게 만족을 주는 일은 없었다.5)

다음에 소개하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은 아펜젤러의 생애를 통하여 전해지는 흥미로운 이야기들이다. 이처럼 직접 그를 대면하신 분들이 전해주는 이야기들을 통하여 우리는 아펜젤러의 신앙(信仰)과 인품(人品)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아펜젤러 선교사와 조사들. 왼쪽부터 유체겸, 조한규, 아펜젤러, 송헌성. 조한규는 상복을 입고 있다.
▲아펜젤러 선교사와 조사들. 왼쪽부터 유체겸, 조한규, 아펜젤러, 송헌성. 조한규는 상복을 입고 있다.

1)아펜젤러와 그의 조사(助師) 조한규

조선에 처음으로 와서 조선어를 가르치는 어학교사 겸, 비서(秘書)로 같이 지낸 분은 조한규라는 분이었다. 이분은 한학자였고, 그림을 그리면 대나무를 잘 그렸다고 한다. 그는 유학(儒學)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조선인의 예의범절과 나이 든 사람과 젊은 사람이 지켜야 할 예절(禮節)이 밝았다. 유학(儒學) 이외에는 다른 학문이 없다고 할 정도로 유학이 최고(最高)의 학문이라고 믿고 살았던 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미국에서 온 선교사들과 가끔 문화적인 충돌을 겪었다고 한다. 선교사들과 충돌이 생기면 노발대발하였고, ‘동방(東邦) 예의지국(禮儀之國)에 대해 네가 무엇을 아느냐?’ 하면서 호통을 치고 싸우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아펜젤러는 조한규 씨와 한 번도 다툰 일이 없었다. 더구나 조한규 씨는 천주교(天主敎)인이어서 신앙생활이 맞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함께 지낸 것을 보면, 아펜젤러가 덕성(德性)이 두텁고 인내심이 많은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6). 조한규는 1902년 6월 11일 서해 어청도 앞바다에서 아펜젤러와 함께 돌아가셨다. <계속>

[미주]
1) 김석영, 처음 선교사 아펜젤러 p. 103.
2) 연세대학, 문고 〈조선교육 개정 기념호〉, 조선총독부 편찬, 발행인 조선(朝鮮)이라는 문헌에서
3) 당시에는 학생들을 학원(學員)이라고 불렀다. 또한 당장(堂長)은 총리교사라고 하였다.
4) 윤성렬, 『도포입고 ABC 갓 쓰고 맨손체조』, p. 21.
5) 사우어(C.A.Sauer) 엮음, (자료연구회 옮김), 『은자의 나라 문에서』, p. 40.
6) 김세환, 『배재 80년사』, (서울, 학교법인 배재학당, 1965), p. 92.

김낙환 박사(아펜젤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전 기독교대한감리회 교육국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