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펜젤러의 영적(靈的) 성장에 일대 전환점을 초래한 것은 그의 회심 체험과 감리교회로의 전환 사건이었다. 기독교 교리에 대한 지성적인 이해와 인격의 변화를 초래하는 영적인 신앙 체험과는 별개의 것이었다.
펜실베니아 웨스트 체스터 주립 사범학교에 재학 중이던 18세의 헨리 아펜젤러는 1876년 10월 1일 그곳 장로교회에서 열린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부흥사 풀턴(Fulton)의 설교를 듣던 중 ‘깊은 감동 속에 철저한 회심’을 체험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죄에 대한 실존적인 자각과 이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을 경험하게 된 일이었다. 교육에 의해 준비된 단계에서 세례를 받았을 때와는 달리 영적으로 거듭나는 뜨거운 체험을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평생토록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헌신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이날을 자신의 영적생일(靈的生日)로 정하고 해마다 이날을 기념하였다1).
아펜젤러의 신생(新生) 체험은 그의 일생을 가름하는 중요한 전환점을 초래하였다. 무엇보다도 개혁교회에 속해있던 그를 감리교인이 되게 하였던 것이다. 회심 후의 아펜젤러는 감리교인들과 접촉하기 시작하였으며, 결국에는 존 웨슬리의 신앙과 삶을 받아들이면서 감리교인으로 자신의 교파를 전환하였다.
“개혁교회에서 감리교회로 옮기는 문제에 대한 이전의 모든 생각과 논쟁들이 모두 끝났다. 나는 감리교회의 완전한 신자(信者)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택한 일이다. 이 일은 한동안의 기도와 묵상 끝에 이루어진 것이다. 1876년 10월 1일에 회개한 이래 나는 주로 감리교도들과 함께 지내면서 개혁(改革)교회에서보다 훨씬 편안하다는 느낌을 가졌다. 나는 감리교회에 가입하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하며, 오늘날 내가 한 일은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2)
아펜젤러가 칼빈주의(Calvinism)를 떠나 웨슬리언(Wesleyen)이 된 것에 대하여 훗날 제임스 게일(James S. Gale)은 조선 선교사들의 생활을 묘사한 소설 속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너무나 기쁘고 행복해서 할렐루야를 외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장로교에서는 그렇게 외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마음껏 소리칠 수 있는 감리교회로 옮겼습니다.”3) <계속>
[미주]
1) William E. Griffis, A Modern Pioneer in Korea: The Life Story Of Henry G. Appenzeller, Fleming H. Revell Co., 1912. 이만열 역, 『아펜젤러』. 연세대학교 출판부, 1985, p. 58.
2) 아펜젤러, 『일기』, 1879년 4월 20일. 유동식, 『한국 감리교회 사상사』에서 재인용, p. 33.
3) 이만열 역, 『아펜젤러』. 연세대학교 출판부, 1985, p. 63.
김낙환 박사(아펜젤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전 기독교대한감리회 교육국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