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펜젤러가 요한 웨슬리의 삶을 따르기로 한 것은 1879년 4월 20일경으로, 랭캐스터 제일 감리교회에 스미스(H. C. Smith) 목사에 의해서였다. 이때부터 그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날을 늘 회상했는데, 그때 감명을 받은 설교도 잊지 않았다. 그것은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1)는 말씀이었다.

1900년 12월 10일 자 일기(日記)에 보면 아펜젤러는 그 전 주일에 영국의 런던에 있는 웨슬리 교회를 찾아간 기록이 있다. 앞마당에 있는 웨슬리의 동상을 보고, 방명록에 이름을 쓰고, 웨슬리의 무덤을 보는 그의 심정이 감회가 깊었음을 말하고 있다. 감명 깊은 예배를 드리고 나서 감리교회의 위대한 창시자가 설교했던 곳에 지금 그가 와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눈물이 고였다고 감격스러움을 기록하였다2).

영국 브리스틀의 웨슬리 채플에 세워진 웨슬리 동상
▲영국 브리스틀의 웨슬리 채플에 세워진 웨슬리 동상 ⓒ위키미디어

존 웨슬리와 마찬가지로 아펜젤러의 신생(新生) 체험은 그로 하여금 선교적인 책임에 눈을 뜨게 하였던 것이다. 그때부터 그의 삶의 목표는 그가 체험한 신생의 기쁨과 하나님의 사랑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어야 한다는 확신에 차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신생을 초래한 죄에 대한 자각과 그리스도에 의한 속죄의 체험은 그의 사상의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신학교에서 그 신학적 의미를 분명히 밝힐 수 있었으며, 이 속죄의 교리는 그가 일생 가르친 핵심(核心) 사상(思想)이었다3). 아펜젤러에 대해 그의 전기를 쓴 그리피스는 이렇게 적고 있다.

“자신의 재능을 그대로 묻어두는 일이 없는 그는 멜로디언을 연주하였다. 노래를 지도하였으며, 잡역부로서도 즐겁게 봉사함으로써 남들로 하여금 부지런해야겠다는 마음을 품도록 만들었다. 「성화(聖化), 칭의(稱義), 한 주일에 1페니」라는 표어대로 그는 가르치고 살았다. 다른 여러 예에서 보듯이 뉴저지에서 「한 사람의 감리교도이며 살아있는 찬송가」였던 그는 유례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교회를 성장시켰다.”4)

유동식은 아펜젤러의 신앙적, 사상적 특징을 그의 책 『한국 감리교회 사상사』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다음에 소개하는 글은 필자가 요약한 것이다.

1897년 독립문이 세워진 직후의 모습. 기공식에 참석한 아펜젤러는 기도하고, 배재학당 학생들은 애국가를 제창하였다.
▲1897년 독립문이 세워진 직후의 모습. 기공식에 참석한 아펜젤러는 기도하고, 배재학당 학생들은 애국가를 제창하였다. ⓒ위키미디어
1. 아펜젤러의 복음 이해의 초석이 된 것은 그가 18세 때에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얻은 그의 회심(悔心)과 신생(新生) 체험이었다. 그는 거기에서 그리스도에 의한 속죄를 통해 신생하는 기쁨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평생토록 이 기쁨을 전하기로 결심하였다.

2. 그가 신생 체험을 통해 얻은 것은 주 안에 있는 평화(平和)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설교를 통해 말한다. “회심하고 믿는 순간 이 모든 불안은 사라지고 모든 이해를 넘어선 하나님의 평화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3. 불멸(不滅) 영생(永生)을 얻게 된 사실이다. 이에 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살 것이며 죽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내 영혼을 사랑하는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나는 만왕의 왕이 지닌 아름다움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나는 주의 집에 영원히 거할 것입니다. 나는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의 필연적인 결과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4. 영적 복음에 입각한 현실(現實) 사회(社會)에 대한 책임(責任)이다. 그는 사단의 존재를 믿었고, 조선의 복음화는 사단과의 싸움을 동반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민족을 도탄에서 구하려던 독립협회의 운동을 적극 도왔다. 1896년 11월 21일, 그는 독립문 기공식에 참여했다. 배재 학생들이 애국가 합창을 하였고, 그는 기도순서를 맡았다. 조선에서 역사상 최초의 공개된 기독교 의식이 진행된 것이다.

5. 그는 높은 수준의 조선 문화(文化)를 꿈꾸고 있었다. 배재학당을 통한 그의 교육활동은 단순한 교양인 수준의 중등교육이 아니라 조선의 문화를 이끌어갈 인재(人才)를 양성하는 고등교육기관이었던 것이다. 감리교회가 마땅히 그리고 반드시 이 나라 720만 사람들을 위한 최고 수준의 교양과 대학 과정, 신학(神學)을 수업할 수 있는 학교를 세워야 한다5)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마지막 안식년으로 미국에 갔을 때도 대학과 신학부(神學部) 건물을 위한 모금 운동을 전개했던 것이다6). <계속>

[미주]
1) 베드로후서 3장 18절
2) 조성환, 『배재대학 인문학 논총, 제6집』 p. 230.
3) 유동식, 『한국 감리교회 사상사』, (서울, 전망사, 1993), p. 34.
4) 이만열 역, 『아펜젤러』, (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1985), p. 70.
5) Annual Report of M.E.C. 1902, p. 324.
6) 유동식, 『한국 감리교회 사상사』, p. 38-45.

김낙환 박사(아펜젤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전 기독교대한감리회 교육국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