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우드 선교사(좌)와 알렌 선교사(우)
▲언더우드 선교사(좌)와 알렌 선교사(우)
독신인 언더우드는 그날 저녁 서울로 들어가 알렌이 마련한 정동 선교부에 도착하였다. 아펜젤러는 서울에 못 들어가더라도 인천에 임시 거처를 확보하고 한국어를 익히며 입경(入京) 기회를 찾으려 했으나 맥글렌시 함장의 강력한 출국 요청에 결국 4월 10일 인천을 출발, 4월 15일 다시 일본 나가사키에 돌아오게 되었다. 이후 아펜젤러 부부는 나가사키에 두 달 동안 머물며 한국어를 배우면서 장차 추진할 선교계획을 구상하였다1).

이로써 서울까지 들어와 감리교 선교부를 개설하려던 아펜젤러의 처음 계획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부인을 데려온 아펜젤러나, 미국 여성을 서울에 들여보낼 수 없다는 맥글렌시 함장에게도 원인이 있지만, 그보다는 전년도 12월에 일어난 갑신정변의 여파로 조선의 정치적 불안 상황에 보다 큰 원인이 있었다. 아펜젤러는 인천을 출발하기 하루 전인 4월 9일, 미국 선교부에 장문의 보고서를 쓰면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심경을 밝히고 있다.

“이 나라는 이직도 정치적으로 불안합니다. 수도에서는 우리 사업을 방해하는 요인들이 남아있는데, 이것들이 제거되고, 허약하고 무질서한 정부가 강해진 후에야, 이 ‘아침 해의 나라’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면서 약간의 진보라도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합니다. 우리는 부활주일에 여기에 왔습니다. 그날 죽음의 철장을 부수신 주님께서 이 백성을 얽매고 있는 줄을 끊으시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들이 얻을 빛과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2)

곧바로 입경하지 못하고 인천의 다이브츠 호텔에 일주일 정도 체류하던 아펜젤러 부부는 일본으로 잠시 되돌아가게 되는데 그는 자신의 짐을 제물포에 그대로 놔두고 돌아갔음을 알게 하는 기록이 남아있다3).

잠시 일본에 돌아갔던 아펜젤러 부부는 같은 해 6월 20일 제물포 항에 재입항해서 며칠간 청국(淸國) 지계(地界) 내에 있던 해리스 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 하지만 두 번째 입항해서도 사정이 여의치 않자 두 사람은 아예 내리교회 부근으로 추정되는 언덕배기 위에 있는 초가집을 전세 내어 7월 29일 완전히 서울로 들어가기 전까지 약 38일 동안 인천에 머무르게 되었다. 때는 마침 장마철인지라 사방에서 비가 새서 그릇이란 그릇은 모조리 물받이로 썼다는 가슴 아프지만 정겨운 기록이 남아있는데, 바로 이 초가집이 체류 기간 조선선교 전반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린 곳이라고 추정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4).

특히 2차 제물포 체류 시기에 잊을 수 없는 사건은, 아펜젤러 내외가 조선 최초로 오르간(風琴) 연주를 했다는 사실이다. 1885년 7월 7일 증기선을 통해 일본에서 도착한 수화물 가운데 오르간을 풀어 아펜젤러는 부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찬송가를 연주했던 것이다. 부인 엘라는 미국 랭캐스터에 있는 친구인 리찌 이글리(Lizzie Yegley)에게 쓴 서신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오르간이 방금 도착했는데 다 괜찮아, 좋아. 약 1시간 전에 해리5)가 「만복의 근원 하나님」이라는 찬송 등을 연주해서 봉헌하였어. 조선 상공에 울려 퍼진 최고의 감리교 찬송이었지. 온 조선 땅이 어서 빨리 이 찬송을 들었으면 해.”6)

이때 머물렀던 38일간의 인천 체류는 인천에 내리교회7)가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아펜젤러는 후에 정동교회를 사임하고 배재학당을 돌보면서 내리교회에서 전문사역을 하기도 하였다8).

아펜젤러의 기도는 오래 걸리지 않아 응답되었다. 일본에 남아있던 스크랜턴은 한 달 후 입경(入京)을 시도하였고 성공하였다. 인천 내리에 머물던 아펜젤러 부부도 두 달 후에 다시 서울로 입경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날은 바로 1885년 7월 19일이었다. 감리교회로서는 역사적인 날이다. <계속>

[미주]
1) 이덕주, 『서울 연회사I』, p. 49.
2) 「Annual Report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1885」, p. 237. “Correspondence from Methodist Episcopal Mission.” 〈The Gospel in All Land〉, 1885, p. 328. 이덕주, 『서울 연회사I』 에서 재인용, p. 50.
3) The Methodist Church, however, may rightfully be said to have entered Korea at this time, as we left a part of goods behind. 아펜젤러가 맥클레이에게 쓴 편지 중에서, 김흥규, 『내리교회, 제물포웨슬리예배당 복원과 아펜젤러 비전 쎈터 신축의 역사적 의의와 그 전망』, p.6
4) 위의 책, p.7.
5) 해리, 아내 엘라가 남편 아펜젤러를 부를 때 사용하던 애칭
6) The organ Just came, and is all right, It is fine. About an hour ago, Harry dedicated it by playing, ‘Praise God From Whom’, etc. The first Methodist strains ever borne on Korean air. May it not by long before the whole land shall here them. 1885년 7월 엘라가 랭캐스터에 있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 김흥규, 『내리교회, 제물포웨슬리 예배당 복원과 아펜젤러 비전센터 신축의 역사적 의의와 그 전망』, p. 7에서 재인용.
7) 아펜젤러는 부인과 더불어 곧바로 입경하지 못한 채 두 차례에 걸쳐 약 38일 동안 제물포에 체류했다. 특히 두 번째 체류 기간에는 아예 초가집을 세내어 내리교회 주변에 기거하면서 선교적 사역이라고 볼만한 일들을 여러 차례 시도했다.
물론 아직 그 시기에는 예배당도 세우지 못했고, 그 어떤 가시적 선교의 열매도 맺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선교의 씨앗은 뿌려졌다. 그리고 이 씨앗이 자라나 몇 년 후 내리교회라는 인천 최초의 공식적이고 제도적인 교회로 발전되어나갔던 것이다.
아펜젤러가 씨를 뿌린 내리교회는 그 후 눈부신 성장과 발전을 이룩해왔다. 1887년에 아펜젤러가 인천에 파송한 노병일은 1890년에 조선 최초의 자비량 예배당인 회당 여섯 칸을 건축했다. 1894년 조선 최초의 여성 전용 예배당을 자력으로 건축했다. 아펜젤러를 뒤이어 제2대 담임목사요, 제물포 선교 책임자로 부임한 존스(趙元時) 목사는 1893년 강화 교산교회 개척을 필두로 담방리교회(현 만수교회), 강화 홍의교회, 강화 상도교회, 강화 고비교회, 부평 굴제교회 등을 차례로 개척하여 ‘내리’는 명실상부 인천 강화 선교의 전초기지가 되었다. 1892년에는 존스 선교사의 부인에 의해서 영화학교가 설립되었는데, 현존하는 조선 최초의 초등교육 기관이 되었다.
내리는 또한 1901년 5월 김창식과 더불어 안수받은 조선 최초의 목사요, 노병일이 전도해서 얻었던 인천 최초의 결신자인 김기범 목사를 배출했다. 그 5대째 후손이 오늘까지 내리에 출석하고 있다는 사실은 내리 역사의 유장함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오늘날 조선 감리교회의 못자리판이요 허브라 할 수 있는 중부연회의 모태가 된 서지방 조직에 있어서도 내리가 중심축이 되었다(내리교회 홈페이지).
8) 위의 책 p. 8. 아마 1891년경으로 추정된다.

김낙환 박사(아펜젤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전 기독교대한감리회 교육국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