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
언더우드는 일본에서 귀중한 동지를 만나게 되는데, 그들은 조선에 들어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 G. Appenzeller)였다. 결국 이 두 사람은 한국 개신교 선교의 개척자가 되었다. 언더우드는 아펜젤러와 같이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에 조선의 인천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언더우드는 한국에 첫발을 디딘 후, 제중원(濟衆院) 의학생들에게 화학, 물리를 가르치며 조선어를 배웠다. 그리고 고아들을 모아 가르쳤는데, 후에 이 고아원은 선교사 게일(James S. Gale)2)에 의하여 경신(敬神) 중·고등학교로 발전하였다. 그는 조선 개화기의 개척자로서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사(大使)로써 자신을 온전히 선교지에 바친 사람이었다.
언더우드는 한국에 들어온 미북장로교회의 최초 선교사로서, 그의 모든 활동과 선교 원리들은 이후 한국에 들어오는 선교사들의 교본처럼 사용되었다. 성경을 번역하고, 찬송가를 편찬하여 한국교회의 성장과 신앙 및 신학 형성의 틀을 세웠다. 그는 말씀과 전도, 기도를 강조하면서도 신비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지도하였다. 다양한 사회활동으로 구령사업도 하였는데, 소자(小子)에게 물을 주는 성경적 신행(信行)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한국의 근대화에도 많은 공을 남겨 경신학교, 연세대를 설립하고, 한국어 문법책과 한영·영한 사전 편찬 등을 했다. 그의 후손들은 4대째 한국에서 복음사역을 하였다.
그는 31년간 한국교회, 한국 사람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다가 발진 티푸스에 걸려 병을 치료하러 56세에 미국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57세에 미국에서 소천(所天)하였다. 한국에서 많은 사역을 하다가 쇠약해져 순교한 것으로 보인다.
언더우드가 조선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선교거점을 세우는 일련의 과정은 매우 숨 가쁘게 이뤄졌다. 아펜젤러가 한국에 들어오기 전인 1883년부터 3년간 조선 선교를 위한 미감리교회 선교국의 준비가 차근차근 진행돼 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조선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였다. 다음은 이를 정리한 기록이다.
“1883년 가우처 박사를 비롯해 미북감리교회가 한국선교의 필요성을 느끼고 1883년 선교회 총회(General Commitee of Missionary Society) 회기 동안에 5천 달러의 금액을 일본 선교계정에 증액하였다. 5천 달러 중 2천 달러는 가우처가 기부한 것이었다.
1884년 6월 13일 일본 선교부 감리사 맥클레이 박사가 비밀리에 한국에 파견되었다.
1884년 7월 3일 맥클레이 박사가 김옥균을 통해 조선의 국왕에게 제출한 조선에서의 교육과 의료 선교의 계획을 조선 국왕으로부터 승인을 받고 귀일하였다.
1884년 조선 선교사를 결정한 미국 북감리교회의 선교회는 스크랜턴 박사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하고 곧이어 아펜젤러 목사를 임명하였다. 부인외국선교회에서는 스크랜턴 대부인을 조선 여성을 위한 선교사로 임명하였다.
1885년 2월 3일 3인의 선교사가 샌프란시스코 발(發) 일본행 기선에 승선하고, 1885년 2월 27일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하였다.
1885년 3월 5일 맥클레이 감리사가 주재하는 제1회 조선 선교사 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1885년 3월 31일 아펜젤러 부부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나가사키 항에서 조선을 향해 출발했다. 4월 2일 부산에 도착하고 다시 4월 5일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1885년 4월 13일 정치적인 상황이 여의치 못해 입경이 어려워지자 일본으로 철수하였다.
1885년 5월 3일 스크랜턴 박사가 단독으로 인천에 도착하였으나, 그도 서울 입경이 여의치 않자 인천에 약 20일간 머물다가 5월 22일 알렌을 만나 서울로 가게 되었다.
1885년 6월 20일 아펜젤러 선교사가 아내와 스크랜턴 선교사의 부인과 그의 딸, 그리고 메리 스크랜턴과 더불어 제물포에 다시 도착하였다. 스크랜턴 부인과 메리 스크랜턴은 즉시 서울로 가고, 아펜젤러는 거처가 마련되지 못하여 인천에 다시 38일간 머물게 되었다.
1885년 6월 24일 스크랜턴은 제중원 초빙의사직을 사임하고 영국인 칼스의 소유를 구매하여 선교기지를 확보하였다.
1885년 7월 19일 아펜젤러 선교사가 인천을 떠나기에 앞서 조선 최초의 종교집회를 갖게 되었다. 7월 29일 서울에서 스크랜턴과 합류하게 되었다.
1885년 8월 3일 아펜젤러 선교사가 두 학생을 가르침으로 배재학당이 시작되었다.
1995년 9월 10일 스크랜턴의 정동 진료소가 개설되었다. ‘시(施)병원’이란 이름을 고종이 지어 주었다.
1886년 고종 황제께서 ‘배재학당’이란 이름을 지어 주었다.”3) <계속>
[미주]
1) 이수정의 호는 전제(荃齋). 아버지는 병규(秉逵)이다. 당시 실권자인 민영익(閔泳翊)의 서생(書生)으로 있으면서 민영익의 집에서 경영하는 홍삼의 수출 문제로 부산항에 갔다가 1881년 3월 일본 영사 곤도[近藤眞鋤]를 만나는 등 일본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 민비가 충주로 피난 갈 때 공을 세워 민비의 총애를 받았다. 1882년 수신사 김홍집(金弘集) 일행 사절에 동행한 민영익의 개인수행원으로 일본에 갔다. 농업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중 친구인 〈농정신편 農政新編〉을 저술한 안종수(安宗洙)의 소개로 당시 일본 농업계의 대표적 인물인 쓰다[津田仙]를 찾아갔다가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민영익 일행이 귀국한 뒤 도쿄[東京]에 남아 도쿄 외국어학교 한국어 교사가 되었다. 1883년 4월 야스카와[安川]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도가 되었다. 이후 〈현토한한신약성서 懸吐韓漢新約聖書〉를 번역해 1884년 간행했고, 이어 〈한역성경 漢譯聖經〉을 가지고 〈마르코의 복음서〉를 번역해 1885년 초에 간행했다.
한편, 조선에 기독교 선교를 위해 장로교 녹스 목사와 감리교 맥클레이 목사에게 미국 선교사 파견을 부탁했으며, 1884년 3월 미국선교사에게 대필 시켜 미국 선교잡지에 〈한국의 사정〉이라는 호소문을 게재하고, 그해 12월에는 자기 이름으로 세계선교 평론지에 한국 전도의 중대성과 긴박성을 강조했다. 1885년 장로교에서 언더우드 목사, 감리교에서 아펜젤러 목사를 조선에 파견하자, 언더우드에게 한국말을 가르쳤으며 언더우드는 이수정이 번역한 〈마르코의 복음서〉를 얻어 가지고 한국에 부임했다. 일본인들에게 조선 실정을 올바로 알려주기 위해 1884년 8월 조선 지리에 관한 〈조선일본선린호화 朝鮮日本善隣互話〉를 간행했으며, 1887년 간행된 〈명치자전 明治字典〉의 조선 음훈(音訓) 표기를 담당했다. 이 밖에도 한국의 풍속과 제도에 관한 글을 잡지에 발표했다. 1885년 11월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에 망명한 인물이 일본 정객과 결탁하여 본국에 쳐들어간다는 소문이 떠돌자, 즉각 본국에 보고할 정도로 그들에게 적대적으로 행동했으나, 1886년 정부의 유학생 소환령에 따라 귀국했다가 도착 즉시 처형되었다.
2) 한국 이름은 기일(奇一). 1888년 토론토대학교를 졸업하고 YMCA로부터 선교사로 임명받아 한국에 온 이후, 1890년 토론토대학교 선교부가 해체될 때까지 평신도 선교사로 일했다. 한국에 와서 여러 곳을 순회하며 말과 풍물을 익힌 다음, 1890년부터 성서공회 전임 번역위원이 되어 성서를 번역하고 한국성교서회(韓國聖敎書會) 창립위원이 되는 등 문서선교의 기틀을 잡았다. 1891년부터는 북장로교 선교부 소속으로 1898년까지 주로 원산에서 성서를 번역했고, 조선 최초의 〈한영대자전 韓英大字典〉을 편찬했으며, 후에 한국교회를 이끌 많은 사람들을 기독교로 끌어들였다.
1897년에는 미국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고, 1898년 함경도가 캐나다 장로교의 선교 지역으로 결정됨에 따라 서울로 와서 새롭게 선교를 시작했다. 1900년부터 연동교회(蓮洞敎會)에서 선교사로 임명되어 목회를 시작했으며, 연동여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서울을 중심으로 이상재·이승만 등 지식인과 밀접한 교우관계를 맺어 그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는 데 주력했으며, 1904년에는 교육협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또 1909년에는 〈야소교회보 耶蘇敎會報〉 주필이 되어 교회신문의 산파역을 맡았으며, 1911년 예수교서회 부회장, 1917년 한국음악연구회 조직, 1918년 성서잡지 발간 및 한국고전의 영어 번역, 1925년 성서전서 번역, 연동교회·평양신학교·피어선성서학원에서의 교육, 영국왕립아시아학회 한국부 간사 등 활발한 활동을 했다. 그 밖에도 한국의 역사·문화·언어 등에 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연구하여 〈과도기의 조선, Korea in Transition〉·〈Korean Sketches〉 등 수많은 저서와 논문을 집필했다.
3) 황규진, 홍종만 『인천 서지방사』 p. 41-42.
김낙환 박사(아펜젤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전 기독교대한감리회 교육국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