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말에 미국 시민권과 의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귀국한 서재필 박사가 1896년 5월부터 매주 목요일 배재학당에서 실시하는 세계 지리, 역사 및 정치학, 의사 진행법 등에 관한 특강은 배재에서 공부를 시작한 우남에게는 커다란 충격 그 자체였다. 서재필의 강의에 매료된 우남은 1896년 11월 말 서재필의 지도하에 조직된 토론 위주의 학생회인 협성회에 가입하여 협성회의 서기, 그리고 나중에는 회장직을 맡았다.

우남과 배재학당에서 같이 공부를 했던 신흥우에 의하면 학생들에게 민주주의라는 낱말을 처음 소개해준 것은 서재필이었다고 한다. 우남은 1912년에 쓴 글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협성회회보
▲서재필의 지도로 조직된 토론 위주의 학생회인 협성회에서 발간된 협성회회보

“내가 배재 학당에 가기로 하면서 가졌던 포부는 영어를, 단지 영어만을 배우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곳에서 영어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을 배웠는데 그것은 정치적 자유에 대한 사상이었다. 조선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어떻게 억압받고 있었는지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기독교 국가 시민들은 그들의 통치자들의 억압으로부터 법적으로 보호받고 있다는 사실을 생전 처음으로 들은 나의 가슴에 어떠한 변화가 있었던지 상상할 수가 있을 것이다. 너무나 혁명적인 것이었다. 나는 「우리나라에도 그와 같은 정치적 원칙을 따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1)

이러한 글을 미루어 볼 때 우남은 서재필을 통하여 동양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 서양적인 사고로 전환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남에게 서재필은 훌륭한 교사요, 따라야 할 본보기가 되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서재필은 젊은이들에게 민주주의에 대하여 강의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우남에게, 그리고 한국 정치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실험’을 시작하게 하였다. 그것은 학생들로 하여금 토론회를 하게 한 것인데, 당시까지만 해도 조선 사람들은 제멋대로의 논쟁에는 익숙해 있었지만 이처럼 질서 있는 토론에는 전혀 경험이 없었다.2)    

서재필은 학생을 두 조 또는 두 팀으로 나누어 선정된 주제에 대해서 한 팀은 찬성하는 연설을 하게 하고, 또 다른 팀은 그것에 대해서 반대하도록 한 것인데, 이것은 자신이 미국 고등학교 시절에 경험한 것을 이식한 것이었다. 물론 학생들은 참신한 행사에 흥미를 느낄 뿐 아니라 열성적으로 토론에 참가했는데, 협성회라는 조직하에서 행해진 토론회는 조선 땅에서 처음으로 조직된 의회를 방불케 하는 모임이었다.3)

한인대표자대회
▲1919년 4월 미국 필라델피아 소극장에서 열린 한인대표자대회에 참석한 대표자들. 앞줄 왼편의 태극기를 든 여성(검은 코트) 바로 오른쪽 뒤 서재필과 그의 오른쪽에 이승만

우남에게 서재필이 특별한 인물이라면, 서재필에게는 우남이 또한 특별한 인물이었던 것을 다음과 같은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서재필은 1949년 올리버에게 써 보낸 ‘이 박사에 대한 나의 인상(My Impression of Dr. Lee)’이라는 글에서 그와 이승만과의 사제 관계에 대하여 회고하며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1987년 서울에 있는 미국 선교사 학교인 배재학당에서 가르칠 때에 나는 당시 그 학교의 학생이었던 이승만 박사를 만났습니다. 그는 당시 20살의 어린 청년이었지만 매우 신중하고 야망에 가득 찬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장차 교육 사업에 자신을 헌신하기를 원하였고, 내가 하는 활동들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당신이 한국국민들의 안녕(安寧)을 위하여 헌신(獻身)하기를 원한다면 유럽이나 미국에서 행하여지는 자유주의 교육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리더십을 반드시 준비해야만 한다’고 말해 주었습니다.”4)

우남은 미국 조지 워싱턴 대학에서 공부할 당시 네 번째 학기를 마치던 1906년 겨울에 은사인 서재필에게 하버드대 대학원에 진학할 의사를 밝히면서 자문을 구하는 편지를 보냈다. 서재필은 1906년 말과 1907년 초에 쓴 그의 답장에서 하버드 대학에 진학하려는 제자의 계획에 대하여 찬사를 보내면서 하버드 대학에 진학 역사학을 전공하여 1년 이내에 석사 학위를 받고 귀국 할 것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그는 박사학위를 취득할 필요는 없을 것이라고 충고하였다.5) 이러한 내용의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것은 미국 유학 중인 우남에게 서재필은 스승으로서의 영향을 계속해서 주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로부터 훨씬 후인 1919년 4월에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대한인 총 대표회의에서 서재필은 우남이 대통령이 되도록 추대하고 옹호하는 발언을 한다. 4월 16일 오전 회의에서 그는 아래와 같이 우남을 노골적으로 칭찬하는 발언을 하였다.6)

“...이승만 박사는 놀랄 만큼 훌륭한 업적을 달성한 인물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과거 20년간의 역사를 통해 그를 여러분의 지도자로 절대 신뢰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지옥의 열화(烈火)같은 고난을 극복한 인물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로 5년간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는 여러분의 신뢰를 받을 만합니다.”7) <계속>

[미주]
1) 이승만의 비망록, “Autobiographical Note, 1912.”
2) 이정식은 이때부터 이미 백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한국에는 토론문화가 정착하지 못한 모양이라고 했다. 2001년 5월 16일 자의 『조선일보』 연재물 ‘기본을 세우자’ 13번째 글의 제목은 「귀 막고 제 목청만... 토론문화가 없다」인데 부제는 「의견 갈리면 폭언, 욕설, 삿대질 일쑤, TV 토론회, 공청회 등 곳곳서 충돌」이라고 되어있다며 한탄하고 있다.
3) 이정식, 위의 책 p. 47.
4) 서재필(Philip Jaisohn), “Jaison on Rhee”, p. 1. 올리버 수집, 이정식 소장 문서
5) 서재필이 이승만에게 보낸 1906년 12월 27일 자 편지(이화장 소장)
6) 유영익, 논문 「이승만의 독립운동과 서재필,」 2006. 11. 6 우남 이승만 연구회 1차 학술회의 자료집 p.4.
7) The First Korean Congress, p. 71.

김낙환 박사(아펜젤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전 기독교대한감리회 교육국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