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필은 조국으로 돌아온 다음 아펜젤러의 집에 머물면서 1896년 민중계몽을 위한 ‘독립신문’을 발행하는 한편 배재학당을 통하여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서재필은 배재학당에서 우남 이승만과의 인연을 가지고 있다.
1896년 5월부터 배재학당에서 강의를 시작했을 때, 우남은 그로부터 수업을 듣게 되면서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로 인연을 맺게 되었다. 서재필은 귀국해서 3년 남짓 활동하고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지만,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유감없이 표출할 수 있었다. 이는 그가 미국인 신분으로 정부의 간섭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재필은 곧 우남이 존경하는 본보기가 되었다. 21살의 우남이 서재필이라는 인물에 매료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러 가지 있었다. 우남보다 11살 위밖에 되지 않았지만 서재필은 이미 보통 사람이 평생을 살면서 겪었을 경험의 몇 배나 겪은 사람이었고, 1895년 12월에 한국에 돌아온 이래 그는 장안의 명물로 각광을 받고 있었다.
서재필은 명문가 집안의 자손으로서 나이 18세에 과거에 급제했고, 1883년에 일 년 동안 조선 왕조가 첫 번째로 파견했던 해외 유학생의 일원으로 일본에서 공부한 바 있고, 돌아온 후 조련국 사관장, 즉 군관학교의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나이 20세 때인 1884년에 김옥균이 이끄는 갑신정변에 참여하여 정부를 전복시켰지만, 3일 후에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청나라 군대에 의하여 꿈이 좌절되어 망명길에 나섰는데, 그들은 역적으로 몰려서 부모와 형제, 아내와 자식들이 처형되는 참변을 겪어야 하였다.
김옥균, 박영효 등은 일본의 명치유신을 모델로 삼고 정변을 일으켰다. 명치유신을 성공적으로 이끈 것은 사쓰마, 초오슈우의 무사들과 토사의 조직되고 무장된 지방 봉건세력이 중앙정권을 타도하는 것이었는데 반하여 조선의 개혁파는 수십 명의 병력으로 혁명을 일으켜 보려고 했다. 그리고 일본의 무사들은 격전을 벌일 의도가 없던 도쿠가와 세력에 대항하였던 반면, 조선 왕국의 보수 세력은 상대적으로 막강한 청나라 병력을 동원할 수가 있었다. 일본은 김옥균 등의 음모에 도움을 주기는 하였으나 중국에 대항할 의도는 없었기 때문에 중국 병력의 개입으로 삼일천하가 무참하게 무너진 것이었다.
서재필은 실패한 혁신파 두목들과 함께 구사일생으로 도망을 가기는 했으나, 이들은 일본 정부에게 외교적인 부담이 될 뿐 아니라 이득이 없으므로 푸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는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미국으로 가기로 정하고, 상선을 타고 난생처음으로 태평양을 건너게 되었는데 그것 역시 하나의 커다란 모험이었다. 어쨌든 망명객 서재필은 미국에서 정규적인 중등교육과 대학 교육을 받았고, 그 후 조지 워싱턴 대학에서 의학사 학위도 받았다.2) 그러는 동안 고국에서는 많은 변동이 일어났는데, 일본이 한국에서 청나라를 몰아낸 것이었다. 이에 따라 서재필의 옛 친구들이 권좌로 복귀하게 되었고, 그들은 서재필에게 쓰인 역적이라는 누명을 거두어 버렸다. 또 그를 중추원 고문이라는 자리에 임명하여 귀국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배경 하나만으로도 그는 서울 장안에서 이목을 끄는 인물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가 귀국했던 1895년 당시 서울은 작은 마을은 아니라도 그리 넓은 세계도 아니었다. 신문이라면 일본 상인들이 발간하는 ‘한성신보’밖에 없었고, 라디오도 없는 세상이었던 반면, 사람의 입을 통한 소문이 빨랐다. 그래서 서재필의 귀향은 장안의 화젯거리가 되었는데, 이는 특히 그가 서양인 부인을 데리고 왔기 때문이었다. 당시 한국에서 서양 사람을 본다는 자체가 아주 드물게 있는 기이한 일이었는데 서양 여자를 본다는 것은 더욱 그랬다.3) <계속>
[미주]
1) 이승만의 비망록, ‘Rough Sketch’
2) 이정식, 이승만의 구한말 개혁운동(대전: 배재대학교 출판부, 2005) p. 42, 이정식은 서재필과 관련하여 자신의 저서, 『구한말의 독립 개혁투사 서재필』,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3)을 참조하기를 권하고 있다.
3) 이정식, 위의 책, p. 43.
김낙환 박사(아펜젤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전 기독교대한감리회 교육국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