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당시 서재필 박사
▲1948년 당시 서재필 박사

1894년 갑오개혁이 이루어지면서 갑신정변으로 서재필 등의 급진개화파에게 내려진 역적의 죄명이 벗겨졌다. 서재필은 망명 중 미국에 들른 박영효의 권유를 받아들여 1895년 12월에 기독교인이 되어 귀국하였다. 귀국 후 개화파 정부는 서재필을 외부협판으로 기용하려 했으나, 서재필은 보수파로부터의 만약의 방해에 대비하기 위해 권력의 내부에 들어가기보다는 권력의 외부에서 안전한 미국 시민으로 민중을 계몽하고자 하였다.

이에 개화파 정부와 근대화운동의 한 방편으로 신문 발간을 합의하고 신문 창간의 자금과 생활비를 지원받는 한편, 1896년 1월에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국내 온건개화파의 각종 보호와 지원, 그리고 정부의 재정 지원으로 1896년 4월 7일 창간되어 1899년 12월 4일까지 발간된 ‘독립신문’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이다. 주시경의 노력에 힘입어 순 한글로 간행되었으며 영문판 ‘The Independent’로도 발행되었다.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창간한 후에는 이상재·남궁억·이완용·김가진·안경수 등과 함께 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를 창설하고 고문이 되었다. 초기에 고급관료들에 의해 주도되었던 독립협회는 이후 토론회·구국상소·만민공동회 등을 통해 민중의 계몽과 근대화에 노력하였다.

1925년 당시 서재필(왼쪽)과 안창호(오른쪽)
▲1925년 당시 서재필(왼쪽)과 안창호(오른쪽)

또 서재필은 배재학당에 강사로 나가면서 1896년 11월 13명의 회원으로 협성회(協成會)라는 학생토론회를 조직했는데, 1년 만에 회원이 약 200명으로 증가했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러 있던 상황에서 조선에 대한 경제적·문화적 침투에 한계를 느낀 러시아는 군사적·정치적 압력을 확대하면서 만주와 조선에 대한 침략정책을 폈다. 이에 서재필은 러시아의 대한정책과 동아시아 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논조의 기사를 쓰는 한편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러시아 고문단의 철수를 요구했다. 친러정권과의 대립으로 중추원 고문직에서 해고되자 1898년 5월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서재필은 필라델피아에서 1924년까지 인쇄업과 각종 장부를 취급하면서, 사무실용 가구를 파는 필립제이슨 상회를 경영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재미한인들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연합대회를 개최하고 자신이 의장이 되었다. 이 대회의 결과에 따라 상해임시정부의 구미위원회 산하에 한인통신부를 설치하고 영문기관지로 ‘한국평론(Korea Review)’을 월간으로 발간했으며, ‘어린이’·‘순난자’·‘대한정신’ 등 영문 소책자를 발행하여 배부하였다. 이 책들은 미국에 일본의 만행을 소개하고 독립의지를 표현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으며, 지방순회 강연의 홍보책자로 활용되었다. 또한 이 통신부에 한인연합대회에 연사로 초빙되었던 미국인들을 중심으로 하여 한국의 자유 독립 원조 및 한일 기독교도의 선교 자유 보장과 한인이 당하는 일본인의 악형을 영구히 방지하며, 미국의 일반 국민에게 한국의 진상을 전파할 것을 목적으로 한 한국친우동맹(The League of the Friends of Korea)이 결성되어 구미위원회의 활동에 많은 기여를 했다.

서재필 선생의 생가가 있는 전남 보성의 서재필기념관 전경
▲서재필 선생의 생가가 있는 전남 보성의 서재필기념관 전경 ⓒ보성군청
한편, 1920년과 1921년에는 3·1운동 기념식을 뉴욕에서 열기도 했다. 1921년과 1922년 워싱턴에서 일본의 해군력 팽창을 억제하고 중국 침략을 견제하려는 취지에서 미국이 주최한 태평양회의가 열리자, 임시정부 대표단의 한 사람으로 370여 단체의 서명을 받은 연판장을 일본대표 도쿠가와[德川家達]에게 제출하고 우리나라의 독립을 각국 대표와 세계여론에 호소했다. 그러나 서재필은 이 회의에서 조선 문제가 전혀 논의되지 않자 실망하여, 경제난으로 한인통신부와 한국친우동맹에 관한 사업을 정지한다는 보고를 구미위원회에 보냈다.

이후 그는 미국에서 양탄자를 취급하는 이탄뉴 상회의 사장으로 사업에 종사했다. 1925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범태평양회의가 개최되자 송진우·백관수·신흥우 등과 함께 우리나라 대표로 참석하여 일본의 잔학함을 규탄하고 독립에 대한 지원을 호소했다. 1926년 펜실베이니아의과대학의 특별학생으로 등록했으며, 그 후 여러 병원의 고용의사로 종사하는 한편, 몇 편의 병리학 관계 논문을 썼다. 1936년부터는 필라델피아에서 개업의로 생활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징병검사관을 했다고 한다. 그동안 국내의 잡지에 대개 민족성 개조와 실력 양성을 주장하는 몇 편의 글을 기고했으며 동아일보에 ‘회고 갑신정변’과 ‘체미 오십년’이라는 글을 영문으로 적어 보내어 번역·수록되기도 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고 9월부터 미군정이 실시되자, 미 군정청(美 軍政廳) 장관 하지의 요청을 받아 1947년 미 군정청 최고 정무관이 되어 귀국하였다. 1948년 국회에서 행해진 대통령 선거에서 1표를 얻기도 했으나, 외국 국적을 가졌기 때문에 무효로 처리되었다. 1948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1) <계속>

[미주]
1)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do?docid=b11s3852b, 브래태니커 사전, 서재필

김낙환 박사(아펜젤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전 기독교대한감리회 교육국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