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1885년 당시 배재의 인물(人物)들

배재학당은 설립 초기부터 기독교 정신을 가르치려고 노력하였다. 복음(福音)을 가르치고 전하는 것은 아펜젤러가 조선에 온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목표는 세월이 지남에 따라 차츰 가시적인 열매로 드러나게 된다. 그것은 배재학당에서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 조선 사회의 각 분야에서 활동하게 된 것이다. 자유와 독립, 그리고 민주주의 정신을 배운 배재의 졸업생들은 일제 식민지 시대에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독립운동에 앞장서고, 독립된 이후에는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지도자들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학당의 교사로 활동하신 분들은 주로 미국에서 들어오신 선교사들이었다. 그들은 미국에서도 프린스턴이나 유니언, 혹은 드류와 같은 우수한 대학을 졸업하고 조선에 온 실력파 인사들이었다. 대개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조선에 오셨기에 열정이 넘치는 분들이었다.

또한 한국인 교사로 활동한 서재필, 윤치호와 같은 분들도 조선의 유학 1세대로,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우수한 인재이자 모두가 애국자들이었다. 이분들의 가르침을 받은 학생들은 서양의 민주주의 정신과 자유 정신, 기독교 신앙을 쉽게 흡수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성장해서 조선의 선각자들이 되었던 것은 대부분 무지에 가까웠던 조선인 사회에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 장에서는 서재필 박사를 비롯하여 윤치호, 이승만, 주시경, 오긍선, 신흥우 등 대한민국의 각 분야에 큰 발자취를 남기신 몇몇 분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가. 송재(松齋) 서재필(徐載弼)

급진개화파의 대표 인물 서재필
▲서재필 박사
서재필의 아버지는 광언(光彦)이다. 서재필은 어렸을 때 친척인 광하(光夏)에게 입양되었고, 7세 때에 상경하여 양모(養母)의 동생인 김성근(金聲根)의 집에서 한학을 배웠다. 1882년(고종 19년)에 별시문과에 합격하여 교서관부정자에 임명되었다. 그는 이 무렵에 개화파 인사들인 김옥균, 서광범 등과 사귀었다.

1883년 5월 일본으로 건너가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서 6개월간 일본어 교육을 받은 후, 도야마 육군학교[戶山陸軍學校]에 입학했다. 약 7개월간 군사훈련을 받고 1884년 7월 귀국해 고종의 승낙을 얻어 사관(士官)을 양성하는 조련국(操鍊局) 사관장(士官長)이 되었다. 그러나 민비의 조카인 민영익이 1884년 군대의 통솔권을 장악하고 군대의 훈련을 위해 청나라 장교를 부르자 서재필은 군에서 쫓겨났다.

1884년 갑신정변에 적극 참여하여, 정변 계획 중에는 일본 유학 경험을 토대로 김옥균과 조선 주둔 일본군 무라가미[村上] 중대장 간의 연락을 담당했다. 정변 진행 중에는 사관생도를 지휘하여 왕을 호위하고 수구파를 처단하는 일을 맡았다. 정권 장악 후 구성된 정부에서 병조참판 겸 후영 영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정변이 실패하자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 일본이 갑신정변에 깊이 참여했다는 외국의 비난에서 벗어나고자 이들을 냉대하자, 1885년 4월에 다시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서재필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낮에는 노동을 하고, 밤에는 기독교 청년회에서 영어를 공부하였다. 1886년 9월에는 펜실베이니아주 윌크스베어시에 있는 해리힐맨 고등학교에 입학해 1889년 6월 졸업했다. 이어 1889년 지금의 조지워싱턴대학교의 전신으로, 당시 워싱턴의 고등학교 졸업자 공무원들을 위해 설립한 야간대학인 코크란대학에 입학하여 1893년 졸업하고, 그해 의사면허를 취득했다.

1930년대 초 서재필과 부인 뮤리엘 암스트롱 모습. 서재필은 계몽강연, 독립신문 발행과 함께 1896년 배재학당에 출강해 이승만, 주시경 등 젊은이들에게 자유민주주의와 참정권, 인권 등을 가르쳤으며, 독립협회를 이끌었다.
▲1930년대 초 서재필과 부인 뮤리엘 암스트롱 모습. 서재필은 계몽강연, 독립신문 발행과 함께 1896년 배재학당에 출강해 이승만, 주시경 등 젊은이들에게 자유민주주의와 참정권, 인권 등을 가르쳤으며, 독립협회를 이끌었다.
서재필은 이때 미국 육군의학박물관에서 동양서적을 번역하는 일로 생계를 유지했으며, 1890년 6월 미국인으로 귀화하여 시민권을 얻었다. 1894년 6월 뮤리엘 암스트롱과 결혼한 후 워싱턴에서 병원을 개업했으나, 백인들의 유색인에 대한 편견으로 생활이 어려워 조선으로 돌아올 때는 주미조선공사관에서 여비를 마련해주었다. <계속>

김낙환 박사(아펜젤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전 기독교대한감리회 교육국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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