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돌려 주라 말할 자가 없도다
본문
이사야 42장 18–25절
서론
불의보다 더 무서운 침묵
세상이 어두워지고 정의가 무너지고 진실이 사라질 때, 가장 무서운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불의가 판치는 것 자체가 아닙니다. 그 불의 앞에서 “되돌려 주라”고 외칠 사람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사야 시대의 유다는 도둑맞고, 탈취당하고,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위해 “돌려주라, 풀어주라” 외칠 중보자와 지도자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군사적 패배나 정치적 몰락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영적으로 무너지고, 말씀을 버리고, 하나님의 길을 떠난 결과였습니다. 그 결과 지도자는 침묵했고, 백성은 절망 속에 갇혔습니다.
침묵은 때로 불의보다 더 무서운 상처를 남깁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시대에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누가 이 일에 귀를 기울이겠느냐? 누가 장래에 일어날 일에 유념하겠느냐?” (23절)
본문 1
1. 왜 하나님의 백성이 도적 맞고 포로가 되었는가?
1) 영적 무감각 (18–20절) : 본문 18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너희 귀머거리들아 들으라, 너희 소경들아 밝히 보라.” 이 말씀은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이 아니라, 여호와의 종이라 불린 언약 백성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직분과 이름은 여호와의 종이었지만, 정작 하나님의 뜻을 보지도 듣지도 못했습니다.
2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많은 것을 볼지라도 유의하지 아니하며, 귀는 밝을지라도 듣지 아니하는도다.” ‘죄가 너무 커진 상태’보다 ‘죄에 대한 감각이 무뎌진 상태’, 영적 무감각이 더 위험합니다. 가장 무서운 병은 통증이 없는 병입니다. 통증이 없으니 치료를 받지 않다가 병이 깊어집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도, 역사의 경고를 보아도, 마음이 반응하지 않는 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2) 하나님의 길과 율법을 거부함 (21–24절) : 2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의로 말미암아 기쁨으로 교훈을 크고 영화롭게 하시려 하셨으나…” 율법은 백성을 억압하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니라, 높이고 영화롭게 하시기 위해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길을 거부하고, 세상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24절은 이렇게 고발합니다. “그들이 그의 길로 다니기를 원하지 아니하며, 그의 율법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하나님의 보호막은 말씀과 순종 안에 있습니다. 그 울타리를 벗어나면, 사탄과 세상이 빈자리를 차지합니다.
3) 하나님의 징계 (24–25절) : 25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여호와께서 맹렬한 진노와 전쟁의 위력을 그 위에 쏟으심에…” ‘쏟으심’은 그릇을 완전히 기울여 부어버리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더 큰 비극은 징계를 받고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4) 중보자의 부재 (22절) : 22절은 “그들이 탈취를 당하되 구하여 주는 자가 없으며…” 고대 사회에서 ‘되돌려 주라’ 외치는 이는 재판관, 선지자, 장로였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시대에는 모두 침묵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사회 속에서도 정의의 목소리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불의를 외면하는 침묵은 결국 그 불의를 더 오래 살게 만듭니다.
본문2
2. 왜 ‘되돌려 주라’ 외칠 사람이 사라졌는가?
1) 영적 지도자의 부재 : 본문 22절은 “구하여 주는 자가 없으며, 되돌려 주라 하는 자가 없도다”라고 탄식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되돌려 주라’는 외침은 주로 하나님이 세운 지도자—선지자, 제사장, 왕—가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며 불의를 책망해야 했고, 제사장은 율법의 기준으로 백성을 가르쳐야 했으며, 왕은 정의와 공의를 세워 억울한 자를 보호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시대에 그들은 침묵했습니다. 왜냐하면 불의를 지적하면 왕의 미움을 받을 수 있었고, 권력의 기득권을 잃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5:31은 이렇게 고발합니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지도자가 타락하면 백성 전체가 방향을 잃습니다. 선장의 나침반이 고장 나면 배는 필연적으로 표류하듯, 영적 지도자의 침묵은 공동체 전체를 혼란에 빠뜨립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정치적 계산과 조직의 안전을 우선하는 지도자가 있다면, 그 공동체는 진리 대신 편의를 선택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교회 내 재정 부정이나 권력 남용을 알면서도 ‘교회가 분열될까 봐’ 침묵하는 경우, 결국 불의가 자리 잡게 됩니다.
2) 공동체의 무책임 : 갈라디아서 6:2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공동체는 서로의 짐을 지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각자 자기 생존에만 집중했고, 불의를 보아도 모른 척했습니다. 성벽이 무너졌는데도 “내 집 앞만 괜찮으면 된다”는 태도로, 성 전체가 무너져 내리도록 방치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공동체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직장에서 동료가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괜히 나섰다가 불이익 당할까 봐” 외면합니다. 교회에서 누군가 상처받고 교회를 떠나도 “내 일 아니니까” 하고 무심합니다. 사회에서 약자가 피해를 당해도 “뉴스에 나올 일 아니면 관심 없다”는 식입니다. 이 무책임은 결국 공동체 전체의 붕괴로 이어집니다. 잠언 24장 11–12절은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를 건져 주며 살륙을 당하게 된 자를 구원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마음을 저울질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아니하시겠느냐”고 경고합니다. 하나님은 약자를 위해 나서지 않는 무책임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3) 두려움과 타협 : 잠언 29장 25절은 분명히 경고합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이사야 시대 사람들은 불이익이 두려워서, 권력자와의 관계가 끊길까 봐, 재산을 잃을까 봐 정의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움은 언제나 타협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빌라도는 예수님이 무죄인 줄 알았지만, 군중과 권력의 압박이 두려워 십자가형을 선고했습니다. 빌라도의 손은 물로 씻었지만, 그의 양심은 씻겨지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에서 불법을 보고도 “잘못 지적했다가 잘릴까 봐” 침묵합니다. 신앙적 가치에 어긋나는 정책이 나와도 “내 사업에 불이익이 생길까 봐” 입을 다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권력 앞에서도 담대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28절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본문3
3.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 (23절)
본문 23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물으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이 일에 귀를 기울이겠느냐? 누가 장래에 일어날 일에 유념하겠느냐?” 이는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나는 지금도 한 사람을 찾고 있다”는 하나님의 절박한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1) 귀를 기울이는 사람 : 본문은 먼저 이렇게 묻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이 일에 귀를 기울이겠느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단순히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열고 주의 깊게 받아들이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붙잡고 흘려보내지 않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3장에서 어린 사무엘은 세 번이나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응답했습니다. 그때 사무엘은 아직 경험이 많지 않은 아이였지만, 말씀을 들으려는 열린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 한 사람이 이스라엘의 영적 기류를 바꾸는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말씀 묵상 시간에 주시는 성령의 조용한 음성, 사건과 환경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경고, 신앙 공동체 안에서 주고받는 영적 권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뉴스 소식, 세상의 소문, 재정 상황에는 민감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에는 둔감합니다.
2) 장래에 일어날 일을 유념하는 사람 : 본문은 또 묻습니다. “누가 장래에 일어날 일에 유념하겠느냐?”, ‘유념하다’는 말은 단순히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깊이 새기고 그것을 행동의 기준으로 삼는 것을 뜻합니다. 창세기 41장에서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하며 7년 풍년과 7년 흉년을 대비하라고 조언했습니다. 단순히 해몽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믿고 구체적인 준비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 준비가 애굽과 주변 나라들을 살렸습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25장에서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의 비유를 통해 기름을 준비하는 신앙을 강조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준비하며 살고 있습니까? 자녀의 학업과 직장은 철저히 계획하지만, 영적 미래는 방치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은퇴 후 생활비는 계산하면서, 하나님 앞에 설 날을 준비하는 기도와 말씀은 소홀히 하고 있지 않습니까?
3) 중보자의 자리에 서는 사람 :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자기 안위보다 공동체의 생명과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출애굽기 32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 하나님은 진노하셨습니다. 그때 모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출 32:32) 모세는 자신의 명예와 생명을 걸고 백성을 위해 하나님의 긍휼을 구했습니다. 에스더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만의 계략으로 유대 민족이 멸망 위기에 처했을 때, 모르드개의 권면을 받고 왕 앞에 나아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 (에 4:16) 그 결단이 민족을 살렸고, 역사의 방향을 바꿨습니다.
결론
오늘 우리의 교회, 가정, 나라에도 이런 중보자가 필요합니다. 무너진 가정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어머니,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위해 자리와 명예를 내려놓는 지도자, 억울한 자를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성도, 하나님은 에스겔 22장 3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 오늘 나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 한 사람’이 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성도 여러분, 오늘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고백합시다. “주님, 제가 그 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귀를 기울이고, 장래를 유념하며, 무너진 데를 막아서는 중보자가 되겠습니다. 침묵이 아니라 믿음의 외침으로 살아가겠습니다.”
결단 기도
주님, 불의와 거짓이 판치는 이 시대 속에서, 제가 침묵하는 자리에 머물지 않게 하시고, 말씀에 귀 기울이고, 장래를 유념하며, 중보자의 자리에 서게 하소서. 내 안위보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며, 가정과 교회와 이 나라를 위해 ‘되돌려 주라’ 외치는 믿음의 용사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유튜브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D8xPFADnwA0)
최원호 목사 (서울 상봉동 은혜제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