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정체성 잃고 권력화, 제도화될 때마다
성령이 시대마다 개혁의 불꽃 일으켜

교회가 성장주의에 몰입하면서 거룩성 상실
개교회주의는 복음을 시장 논리로 전락시켜
개혁은 과거 유물이 아니라 오늘을 위한 명령

교회
ⓒpexels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는 ‘부름 받은 공동체’이다. 이는 단순한 조직이 아니라, 시대와 문화를 향해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라고 부름 받은 사명 공동체를 의미한다. 하지만 이 부름은 역사 속에서 자주 왜곡되어 왔다.

교회가 본래의 정체성을 잃고 권력화, 제도화될 때마다 성령은 시대마다 개혁의 불꽃을 일으키셨다. 이는 마르틴 루터의 1517년 종교개혁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현대교회 역시 이 부름 앞에 서 있다. 개혁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오늘을 위한 명령이다. 영국의 실천신학자 레슬리 뉴 비긴은 말한다. “교회는 자기 자신을 위한 공동체가 아니라 세상을 위한 표지판(sign)이다.”

이 말은 교회가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 아니라, 시대를 살리는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함을 명확히 한다. 2천여 년의 기독교 역사 가운데 유례 없이 한국교회는 분명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복을 받았다. 20세기 중반 이후 전 세계가 주목하는 부흥과 성장, 교육과 의료, 선교와 봉사의 역사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은 열매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은혜가 어디로 흘러갔는가 하는 것이다. 미국의 사회신학자 월터 브루그만은 이렇게 말했다 “은혜가 흐르지 않으면 그것은 썩기 시작한다.”

한국교회는 은혜와 복을 넘치게 받았으되 흘려보내지 못하고 있다. 기도는 넘쳤으나,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책 제안과 연대는 메말랐다. 대형교회는 많아졌지만, 지역사회와의 상생은 줄어들었다. 교회는 교회 안에서만 ‘거룩’하고, 세상에서는 ‘무관심’한 이중적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이것은 단지 윤리의 문제가 아니다. 예수님은 이를 구원의 기준으로 제시하신다. “내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 찾아왔느냐?”는 주님의 질문은, 교회의 정체성 전체를 송두리째 흔드시는 것이다.

다수의 교회가 예배당은 가득하지만, 예배에는 감격이 없다. 이는 외형적 번영 속에 내면의 침체를 반영한다. 한국교회가 ‘성장주의’에 몰입하면서 ‘거룩성’을 상실한 결과이기도 하다. 독일 루터란 신학자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미리 드러내는 공동체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과 다를 바 없다.”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급속히 개교회주의(ecclesiocentrism)로 기울고 있다. 각 교회는 자신만의 브랜드, 방송, 각종 행사에 집중하며 ‘지역 사회’나 ‘다른 교회’와는 별개로 자신만의 성장에 우선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분명히 선언했다. 우리가 분명히 인식해야 하는 사실은 개교회주의는 복음을 시장 논리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만든다. 이것은 ‘교회다운 교회’가 아니라, 신앙을 상품화하는 것이다.

늦었다고 자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이다. 교회의 구조는 내부 관리 중심에서 지역 연대 중심으로 바뀌어야 한다. 교회당의 문은 열려야 하고, 교회의 공간은 동네 주민과 약자들의 피난처가 되어야 한다. 복지 시설, 쉼터, 청년 사역, 상담, 이주민 센터 등 실제적인 ‘하나님의 나라의 전초기지’가 되어야 한다. 교회 자체적으로 변화하지 못한다면, 아마도 시대적 물결에 의해서 교회가 개혁 되어질 것이다.

이선구 목사
▲이선구 목사
결론적으로 개혁은 단지 과거의 사건이 아니다. 오늘을 향한 성령의 부르심이다. 우리는 지금, 양과 염소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 교회는 세상을 위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 땅의 교회에 묻고 계신다. “너는 나에게 무엇을 하였느냐?” 교회와 신앙의 개혁은 선택이 아닌 우리의 사명이다.

이선구 목사(지구촌사랑의쌀나눔재단 이사장, 세계선교연대포럼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