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토론회는 협성회에서 주관하는 토론회와 비슷한 방식으로 운영되었는데, 독립협회는 토론회를 통해 국민을 계몽하고, 정부의 정책 등을 비판하는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윤치호는 이 토론회의 대표 토론위원 중에서도 이상재(李商在), 이병식(李秉式) 등과 함께 2회 이상 대표 토론자로 나서는 등 토론회를 주도하고 있었다.3)
이 토론회를 통해 독립협회는 민중들 속으로 파고들 수 있었다. 당시 협성회를 주도했던 우남이 이 토론회를 주의 깊게 지켜보았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특히 1898년 2월 27일 간부진 개편에서 윤치호는 독립협회의 부회장으로 선출되었고, 이 무렵 윤치호와 이승만, 서재필, 이상재는 독립협회가 주최하는 「만민공동회」에서 인기 있는 연설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이들이 연설하는 날에는 연설을 직접 듣기 위해 서대문 일대가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사람들은 이들을 4대 웅변가로 치켜세우기도 했다.4) 따라서 우남과 윤치호는 잦은 접촉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우남이 윤치호로부터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은 『이승만의 수감이야기, (Mr. Rhee's Story of His Imprisonment)』에도 나타난다. 여기에서 우남은 윤치호를 “군부대신의 아들”, “청나라에서 선교사로부터 배웠으며, 미국의 대학교를 졸업”하여 “청나라에 체류하는 동안 기독교 신자가 되었던 그 분”이라고 소개하고 있다.5) 그러면서 당시 조선의 상류사회의 젊은이들은 윤치호의 영도(領導) 하에 있었는데, 자신도 새로운 형태의 정부를 갈망하는 독립협회 회원들과 만나게 되었고, 그들과 운명을 같이하기로 결정하였다고 회고했다.6)
특히 우남은 위의 회고에서 윤치호가 선교사들의 의도를 확고하게 믿고 있었던 사람이라는 것을 부각시켰다. 이것은 선교사들을 완전히 신뢰하지 못했던 자신과 비교되는 측면을 지적한 것인데, 같은 뜻을 품고 독립협회 활동을 하면서도 당대 거물이었던 윤치호와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었던 자신을 간접적으로 비교한 것이다. 이러한 우남의 회고는 당시 우남이 정치 운동에 가담하면서도 한편으론 종교적인 갈등을 겪고 있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음의 회고는 이러한 사실을 더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 힘든 시절에 나는 좋은 친구들을 알게 됐는데, 조선의 최고 지성들이었다. 우리 집단의 어떤 회원은 기독교 신자가 됐다. 그러나 다른 많은 사람들같이 나는 아직 오랜 종교 신념(유교)에 배어 있었고, 선교단(기독교)을 계속 불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 중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나도 모르게 그들의 진심을 믿게 됐다.”7)
위의 회고에서 알 수 있듯이 우남은 선교사들에 대한 불신을 완전히 해소 시키진 못했지만 윤치호라는 당대 최고의 기독교 지도자를 통해 기독교에 대한 자신의 기존의 입장과 생각에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실감케 한다. 사실 배재학당 학생들을 비롯해 독립협회 회원 등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있어서 서재필과 윤치호라는 인물이 갖는 의미는 엄청난 것이었다. 우남과 함께 배재학당을 다니고 그와 가까웠던 신흥우도 서재필과 윤치호의 지도를 받고, 그들의 수중에 있는 것 자체를 매우 의미 있게 생각했다고 하였다.8) <계속>
[미주]
1) 전택부, 「아, 좌옹 윤치호 선생」, 좌옹윤치호문화사업회, 『윤치호의 생애와 사상』, (서울: 을유문화사, 1998) p. 199-204
2) 신용하, 『獨立協會 硏究: 獨立新聞, 獨立協會, 萬民共同會의 思想)과 活動』, p.93-94
3) 위의 책, p. 94.
4) 김을한, 「풍설 80년」, 죄옹윤치호문화사업회 편, 『윤치호의 생애와 사상』, p. 68.
5) Oliver R. Avison, Memory of Life in Korea, p. 88-89
6) 위의 책, p. 88.
7) 위의 책, p. 89.
8) 전택부, 『인간 신흥우』, p. 50.
김낙환 박사(아펜젤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전 기독교대한감리회 교육국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