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그의 정확한 이름은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원두우 元杜尤)라고 하는데, 그는 1859년 7월 19일에 영국 런던에서 존(John) 언더우드와 엘리자베스 그랜트 메리(Elizabeth Grant Maire) 사이의 여섯 남매 중 네 번째로 출생하였다. 그의 부친은 발명가이며 동시에 사업가였다. 그는 등사용 잉크, 타자기, 잉크리본 등을 발명하였고, 직접 공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언더우드가 여섯 살 되던 해에 어머니, 동생, 그리고 할머니가 한 해에 사망하고, 아버지의 사업까지 동업자의 배반으로 실패하였다. 온 가족이 슬픔과 고난을 당한 것이다. 그의 남은 가족은 언더우드가 13세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가 뉴저지에 있는 뉴더 햄에 정착하였다. 아버지는 미국에서 다시 잉크공장을 차렸고, 1874년 12월 그의 가족은 그로브 개혁교회에 등록하였다.
그로브 개혁교회의 메이븐(Maben) 목사는 호러스 언더우드를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지도해 주었다. 그래서 그는 1877년에 뉴욕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는 매일 12km를 걸어서 통학하였고, 밤 자정까지 공부하고 새벽 5시에 일어났다고 한다.
대학을 졸업하던 1881년 아버지마저 별세하면서 그는 또 한 번의 큰 슬픔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근면과 성실, 경이로운 신앙과 열심을 가진 교인이었던 아버지의 신앙이 호러스에게 그대로 전수되었다. 그 해에 그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뉴브런즈윅(New Brunswick)에 있는 네덜란드 개혁신학교(Dutch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에 입학하여 목회자와 선교사로서 훈련을 받았다.
그는 14살이 되던 해에 인도 사람의 강연을 듣고 인도 선교사로 갈 생각을 하였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대학, 신학교를 거치면서 더욱 확고해지는데, 신학교에서는 선교사가 되기 위해 1년간 의학을 배우기도 하였다.
언더우드는 당연히 인도로 갈 것으로 생각하고, 어떤 다른 인물이 조선에 갈 것으로 확신하였다. 그러나 1년이 지났는데도 아무도 조선 선교사로 자원하지 않았고, 어떤 교회도 그곳에 선교사를 보내려고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지도급 인사들조차 조선 선교는 아직 시기상조라는 글을 썼다.
언더우드는 1년간의 고민 끝에 조선을 선교지로 결정하였다. 그는 개혁 교단에 2차에 걸쳐 조선 선교 청원서를 냈으나 자금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하였고,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에도 두 번씩 청원서를 제출하였으나 시기상조라고 거절당하였다. 결국 그는 미국 내에서 목회를 하거나 인도 선교사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던 중 뉴욕에 있는 한 개혁교회에서 그를 담임목사로 청빙했다. 언더우드는 교회의 청빙을 받자 그 교회로 가기로 수락하였다. 그런데 청빙 수락 편지를 써서 막 우체통에 집어넣으려는 순간, 언더우드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조선에 갈 사람이 하나도 없다니, 조선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No one for Korea, How about Korea?) 너는 왜 못 가는가? (Why don’t you go there?)」
그는 편지를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조선에 가기로 결심하고 바로 장로교단의 선교부를 찾게 되었다.
선교본부에 가보니 브루클린의 라핏교회 평신도인 맥 윌리암스(Mc Williams)라는 사람이 5,000달러를 조선의 선교기금으로 헌금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이로써 언더우드가 우체통 앞에서 들은 신비한 하나님의 음성은 실현되게 되었다. 1884년 봄에 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그해 여름에 조선 선교사로 정식 임명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계속>
김낙환 박사(아펜젤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전 기독교대한감리회 교육국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