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에 관한 기원과 우리의 청원은 상관적 관계 가져
시험과 유혹은 고통스럽지만 승리하고 극복하면 큰 유익

주기도문과 함께하는 송영이 후대에 첨가됐다는 주장 있지만,
송영과 함께 진심으로 주기도문 드리는 자세가 옳다고 보여

시험을 통해 사람은 겸손하여지고 심령이 깨끗이 정화되어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시험을 통해 사람은 겸손하여지고 심령이 깨끗이 정화되어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4) 두아디라 교회를 향해서 주신 말씀은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계 2:26~27)고 하셨다. 철장으로 질그릇을 깨뜨리는 것은 정복과 승리를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와 같이 만국을 정복하시는 동시에 질그릇을 깨뜨리는 육정(세상의 악한 것)에 사로잡힌 세상적인 마음, 악한 마음도 깨뜨리신다. 우리는 세상의 악의 세력을 깨뜨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 아래 오늘도 유혹에서 건짐받도록 이 간구를 드림으로 승리할 수 있다.

(5) 사데 교회를 향해서 주신 말씀은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 하리라’(계 3:5)고 하셨다. 여기 흰옷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옷이며, 그의 피로 씻음을 받은 옷이다. 신약에서 흰옷은 언제나 정결을 표시하며 승리를 표시한다. 죄악과 시험(유혹)에서 구원받고 승리한 성도들의 받을 영광은, 의로운 자를 위한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될 것이고, 악한 자를 위해 살아간 악인은 멸망(심판)의 책에 그 이름이 기록될 것이다.

(6) 빌라델피아 교회를 향해서 주신 말씀은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계 3:12)고 하셨다. 기둥이란 건물의 중요성과 부동성을 유지하게 한다. 하나님 나라의 승리자가 하늘에서 차지할 위치는 중요하고 영원 부동하다. 이러한 기둥에 이름을 새기는 것처럼 승리자의 이마(계 1:3)에는 하나님과 새 예루살렘과 그리스도의 새 이름을 기록한다. 그래서 승리자는 그 이름에 속한 자가 된다.

(7)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서 주신 말씀은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계 3:21)이다. 이것은 일곱 교회의 이기는 자들에게 주시는 상급의 절정이다. 메시야가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 것은 그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마귀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승리하셨고, 부활 승천하셨기 때문이다. 그 영광의 보좌에 승리자도 같이 앉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다. 오늘도 우리는 악(사단)과 시험(유혹)으로부터 이기었을 때 주시는 상급의 절정을 바라보는 소망을 가져야 한다.

결론

이상으로 우리는 주기도문의 우리의 청원(We-Petitions)의 마지막 간구에 대해서 다루어 보았다. 주기도문 자체의 전반부는 하나님에 관한 기원(Thou-petitions)이지만, 후반부의 우리의 청원(We-Petitions)은 전적으로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고 상관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우리에 관한 모든 필요가 충족되는 것은 곧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다. 이와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인간의 모든 필요도 충족되는 상태를 말한다.

이 모든 필요를 충족 받기 위해 마지막 청원에서 하나님은 이중적인 안전장치가 될 수 있는 악에서 구해 주시고, 시험에서도 구해 주시는 구원을 통해 승리를 약속하시며 기도하라고 하신다. 사도들과 신약 교회의 성도들이 오늘날까지 당한 모든 시험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의 원수인 악(사단)의 역사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마지막 청원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들을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현재와 미래를 포함한 확신과 믿음의 청원이어야 한다.

디다케(Didache, 교리와 예배와 성직자들의 행정에 관한 교훈을 포함하고 있는 교회법령집 Church Orders으로 가장 오래된 자료)에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은 하루에 3번씩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그들에게 다가오는 숱한 악(사단)의 시험(유혹)들을 회피하거나 도망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처럼 사단의 시험을 정면으로 대결하여 승리의 개가를 불렀다고 한다. 이러한 여섯 번째 청원의 정신 속에는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사모하는 마음, 하나님만 일사각오로 따르겠다는 고백과 헌신이 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시험(Test)과 유혹(Temptation) 없이 살 수는 없다. 시험과 유혹을 받지 않을 만큼 완전하고 경건한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시험이나 유혹은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그것을 승리하고 극복하기만 하면 우리 삶에 큰 유익을 준다. 그로 인하여 사람은 겸손하여지고 심령이 깨끗이 정화되어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어떤 사람은 신앙생활을 시작하자마자 어려운 시험을 만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인생 전체를 통하여 거의 끊임없이 시험을 당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그 시험이 가벼운 경우도 있고 잠깐의 고통으로 끝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시험(Test)하실 때는 하나님의 정하신 약속과 공의와 그 지혜에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형편과 능력을 저울질하여 그가 택하신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시험(Test)을 주신다. 또한 감당할 시험을 주시므로(고전 10:13) 우리를 도와주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어떤 시험이나 역경 속에서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 안에서(벧전 5:6)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감각이 둔하여 교만한 태도를 취하지 말고 자기의 약함을 솔직하게 인정하면서 여섯째 간구를 드려야 하겠다.

하나님께서는 영적으로 겸손한 자들을 구원하시고 높여 주신다. 때로는 영적 생활의 겸손과 순수성을 시험 받을지라도, 그 시험을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도움만 믿고 의지할 때 모든 시험은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하게 된다.

어거스틴(Augustine)은 “주여 나로 나 자신에게서 구원해 주소서”라고 기도했다. 하나님의 전폭적인 도움을 구하는 기도이다. 본인의 논문에서 우리가 주기도문을 드릴 때 여섯째 간구를 어떤 태도와 내용으로 하는가에 대해 ‘시험과 악한 것의 유혹에서 이기도록 기도한다’는 긍정적(Yes)인 답변이 80%였다. 주기도문의 모든 간구에 대한 질문 중 가장 높은 수치로 긍정적인 응답을 한 것이다. 이 사실은 결론의 서두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하나님의 시험(Test)과 악(사단)의 시험(Temptation)은 일평생 부딪치는 경험의 문제이기 때문에 매일 보호(Daily Preservation)의 은혜를 구하는 심정에서 기도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는 이 기도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이전에 이미 대부분 간구하고, 실천하고 행동에 옮기는 노력의 자리에 있어야 한다.

여기서 토마스 맨튼(Thomas Manton)이 마지막 청원에 대해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적 의지에 따라 이 기원을 드려야 한다는 고백을 소개하면서 본문의 청원을 마치려 한다.

“당신은 참으로 기도하며 시험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선한 수단을 모두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주님께서 계속 당신에게 시험주시기를 기뻐하시면 순종하라. 아니, 하나님이 시험을 계속하시면 현재로서 당신에게 필요한 만큼의 은혜를 주지 않으시더라도 불평하지 말고 주님의 발치에 누워 있으라(lie at His feet). 하나님은 은혜의 주님이시니(for God is Lord oh His own grace).”

Ⅶ. 송 영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For thine is the Kingdom, and the power, and the glory, forever. Amen)

주기도문의 마지막 부분에 괄호 속에 든 기도는 한글개역성경 마태복음 6장 13절에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고 끝맺음을 하고 있다. 이 부분을 송영(The Doxology) 혹은 영광송이라고도 한다. 주기도문에서 송영은 그 기도의 탁월성과 완결성을 명백하게 드러낸다. 주기도문을 연구하는 학자들 가운데 칼빈은 이 송영의 부분을 “생략하지 않는 것이 적합하다”라고 했다.

우리는 기도를 드릴 때 필요한 것을 구할 뿐 아니라, 마땅히 감사와 찬양을 기도의 필수적인 요소로 담아야 한다. 때문에 주기도문에 첨가된 송영은 하나님과 교통케 하는 영혼의 합당한 언어들이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에서는 “주기도문의 마지막 구절이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고 있는가? 주기도문의 마지막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하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기도할 때에 하나님만 믿고, 또 기도할 때에 그를 찬송하여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있다”라고 가르친 것이다. 또 “우리가 우리의 원하는 뜻의 증거와 들으실 줄 아는 표로 아멘 하는 것이다”라고 정의했다.

이제 우리는 예레미아스(Jeremias)가 “기도가 간구로 끝나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고 하여 주기도문에 송영(영광송)이 있어야 할 것을 강조한 것처럼, 마지막 송영을 통하여 기도로써 완벽하게 보여주는 점들과 그 속에 있는 각 단어와 어휘 전체를 마음으로 깊이 묵상하면서 살펴보고자 한다.

1. 주기도문과 함께 사용되고 있는 송영은 마태의 주기도문 본문의 한 부분인가? 아니면 후대에 첨가된 것인가?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개역성경에는 송영이 괄호와 함께 마태의 주기도문 본문 안에 포함돼 있고, 그 대신 성경 하단에 “고대 사본에 이 괄호 안의 구절이 없음”이라는 주(註)를 달아 두고 있다. 누가의 본문에는 그 기록마저도 생략되어 있다.

이 점에 대하여 사본 상의 증거들을 본문 비평 기준을 가지고 평가하면서 연구하는 많은 학자가 있다. 공통된 학자들의 견해는 사본 상의 증거는 송영이 없는 본문이 사본의 질에 있어서나, 광범위한 지역의 분포에 있어서나 송영을 가진 본문보다 훨씬 타당하게 후대에 첨가된 간구로 강력하게 지지를 얻고 있다.

현대 신학자들 중의 한 사람인 메쯔거(Metzger)의 견해는 송영이 없는 본문이 마태의 본래 본문으로, 그리고 송영은 뒤에 첨가된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그는 송영이 있는 주기도문이 성경적 본문에 속한다는 주장을 제외해 버리려는 태도를 가졌던 역사도 있었다.

암부로시우스(Ambrosius)는 그의 저서 중 ‘성례전에 관하여’(De Sacaramentis)에서 송영(영광송)이 없는 주기도문을 수록하고 있고, 그의 같은 책에서는 그 주기도문을 각 청원에 따라서만 해석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주장을 근거로 주기도문과 함께 사용되어온 송영을 제거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수용할 수 없다고 본다.

하르너(P. B Harner, Understanding The Lord's Prayer)의 말을 빌리면 초기의 본문의 증거는 예수님 자신이 주기도문을 주셨을 때 송영을 포함시키지 않으셨다는 것을 보여 준다.

다른 한편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주기도문을 자유롭게 형성된 어떤 기원으로 결론 내릴 수 있기를 기대하셨던 믿을 만한 이유가 있다. 기도문이 ‘어떤 송영’으로 끝나야만 하는 것이 유대 종교의 원리였다. 따라서 예수님은 주기도문이 ‘시험’이나 ‘악’이란 말로 끝나기를 바라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분명히 그는 제자들 스스로 하나님에 대한 적절한 찬양으로 주기도문을 끝내기를 원하셨을 것이다. 송영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구약과 유대 종교에 있는 그들의 부유한 의식적 유산을 활용했을 것으로 지적했다. 예레미아스(Jeremias) 역시 제자들과 초대 교인들이 주기도문을 사용하면서 당대 유대 관습을 따라 어떤 송영과 함께 주기도문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동의하고 있다.

초대 교회사를 연구하는 좋은 자료가 되는 디다케(Didache)를 보면 오늘날 주기도문의 송영과 같은 유형이 있으나 거기서는 ‘나라’가 빠지고 ‘아멘’이 없다. 주기도문 송영의 문구와 같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 기능상으로는 조금도 흐려짐이 없다.

여기서 송영을 제외시키는 데 찬성하는 자들의 견해는 역사적 데이터의 근거가 없는 추측이나 비약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비록 예수님께서 송영이 없는 주기도문을 주셨다고 하더라도 제자들과 초대 교회의 아름다운 유산과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도하는 유대적인 관습, 성경 기자들의 관습처럼, 우리도 송영과 함께 주기도문을 진심으로 드리는 자세가 옳다고 인정한다. <계속>

김석원 목사
국제기도공동체(GPS, Global Prayer Society) 세계주기도운동연합 설립자 및 대표
CCC 국제본부 신학대학원 교수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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