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왜(Why) 용서를 구해야 하는가?
1) 죄를 용서하여 달라는 기도는 모든 기도의 출발이고 신앙생활 성화의 기초이며, 일용할 양식(Daily Bread)을 매일 구하듯 일용할 용서(Daily Forgiveness)도 매일 구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죄라는 단어는 이미 지적한 대로 마태는 ‘빚’, ‘부채’, 누가는 ‘빗나가다’라고 하는 용어를 사용했다. 다섯째 청원을 원문의 뜻을 다치지 않고 연결해 보면, ‘날마다 죄(빚진 자)를 오늘 탕감하여 주신 것같이 날마다 우리의 죄(빚)도 탕감하여 주옵소서’라고 할 수 있다. 알렉산더 맥글라렌은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빵이 필요하게 만들었고 우리는 우리 자신들로 하여금 날마다 용서를 필요로 하게 만들었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육신의 떡의 갈급한 필요를 날마다 가지고 사는 것처럼 내 영혼에 하나님의 용서가 날마다 실현되도록 살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많은 빵의 필요를 얻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용서를 날마다 받아야 한다.
2) 죄의 용서는 적은 것에서부터 아무리 큰 죄라도 범죄의 내용에 관계없이 용서의 범위 안에 두셔서 용서해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죄과를 멀리 옮기셨고(시 103:12),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과 같이 되리라’(사 1:18)고 하셨다. 주홍색은 헬라어에서 ‘두 번 담갔다’는 뜻이 있어서 인간의 기술로는 그 물감을 다시 씻어낼 수 없는 것을 상징한다.
비록 우리의 죄가 주홍색 물감을 들인 것 같을지라도 하나님은 용서 하시고 죄를 씻어 주신다. 예수님의 비유 속에 나오는 임금은 그에게 일만 달란트 빚진 그의 채무자를 용서해 주었다(마 18:27). 한 달란트는 삼천 세겔의 중량이며, 일만 달란트는 거의 십이 톤의 금을 함유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들을 구름처럼 흩어지게 하시고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였으니’(사 44:22)라고 하셨다. 죄를 용서하심의 크기와 내용에 관여하지 않으시므로 우리가 완전히 용서를 받을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3)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뿌리는 하나님의 용서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았고(롬 1:17),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으며(롬 5:8),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우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9)는 확증과 함께 용서해 주시는 그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롬 8:15)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
4) 그리스도인의 용서를 구하는 삶은 자신이 사죄의 축복을 날마다 더 깊이 체험하므로 평안과 희락을 누리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용서 받지 못한 죄인은 마음속에 두근거리는 떨림을 가지고 살아간다. 천둥소리에도 놀라고, 풀잎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에도 놀라며, 두려움과 고통과 슬픔으로 살아간다. 요한 사도는 ‘두려움에는 형벌이 따름이라’(요일 4:18)고 하였다. 형벌(Torment)이라는 헬라어 용어 ‘콜라시스’(κολασις)는 때때로 지옥(Hell)이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두려움은 그 속에 지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빚을 지고 있는 사람은 부채를 해결하지 못해 발걸음마다 체포당할까 두려워하고 고통을 안고 살아간다. 이처럼 용서받지 못한 죄인은 오늘 밤 죽음이 찾아오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있다. 그러나 용서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사죄의 깊은 은총과 함께 날마다 기쁨으로 살아간다.
5) 그리스도인이 용서를 하지 않고 계속 저주하는 생활을 할 때 자신의 건강과 생활에 손해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시편 기자는 ‘저가 저주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축복하기를 기뻐 아니하더니 복이 저를 멀리 떠났으며 또 저주를 옷 입듯 하더니 저주가 물같이 그 내부에 들어가며 기름 같이 그 뼈에 들어갔나이다’(시 109:17~18)라고 저주를 금하지 않는 대가에 대해서 고백했다. 용서는 저주라는 질병을 치료하는 건강제이다. 상대방을 용서하지 못하고 증오할 때 제일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다.
용서할 수 없는 상대방을 축복하고 용서를 먼저 구할 때 영육간에 강건한 삶을 살 수 있다.(요한 3:2),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롬 12:14),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나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3:9), 마지막 때가 이를수록 사람들은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딤후 3:3)라고 했다.
용서는 곧 원통함과 저주스러움을 풀어야 하는 것이다. 마음에 한이 맺혀 있는 사람은 잠도 제대로 못 이루고 평안을 빼앗기고, 그것이 병이 되어 건강을 잃고 만다. 용서를 통해 맺혔던 모든 것을 푸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영혼의 치유는 사죄(용서)와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진다.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약 5:16)고 했다. 용서는 내 자신의 건강을 지키는 것이고, 용서에 이른 후에야 건강한 인간관계가 가능해진다.
6) 용서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9)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 사도는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요일 4:20)고 했다. 사랑은 용서라는 나무에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과 같다.
7)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대상 일지라도 우리는 반드시 용서해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받은 사람들과 같다. 그러므로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반드시 용서해야 한다.
6. 왜 죄 용서를 구하지 않는가. 죄 용서가 절대적이고 필수적임에도 불구하고 죄 용서를 구하지 않고 있음은 무슨 까닭일까?
1) 죄 용서에 대한 확신(Assurance)의 부족 때문이다. 우리는 죄가 우리 양심과 하나님의 비망록에서 지워진다는 사죄의 확신을 가져야 한다. 사죄의 확신의 결과는 내적인 심령의 평안과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통로가 된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일이나…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롬 8:38~39)
죄 용서 받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 죄의 값인 사망에서 생명을 얻었음을 확신하는 삶을 살아간다.
존 브라운(John Brown)은 “사는 날까지는 아무리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도 사죄를 위해 처음 했던 그대로,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은총을 간구하는 자로서 나아가야 한다”라고 말했다. 죄 용서에 대한 확신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격려시키며 인내하게 하며 담력을 준다.
2) 사람들은 절망(despair)에 빠져서 용서를 구하려고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내 죄는 너무나 많고 흉악하기 때문에 분명히 하나님은 나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말하기를 이는 헛된 말이다”(렘 18:12)라는 행위와 같다. 절망은 소망에 이르는 핏줄의 동맥을 끊어버리는 것과 같다. 마귀는 죄를 더 크게 보여주어 영혼을 계속 정죄하는 절망의 죄에 빠지게 한다. 절망의 절규는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자신이 용서 받을 수 없다고 하고 영혼을 정죄하는 죄를 낳게 된다.
7. 용서하고자 해도 상대방이 용서 받기를 원치 않을 때, 또는 끝까지 거절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성경은 그런 사람들에게 권면을 하도록 강조하고 있다. 그 권면의 성격은 어떠한가?
1) 덕을 세우는 것이어야 한다. ‘덕을 세우며 피차 권면하며…’(고전 14:3)
2) 간사함이 없어야 한다. ‘우리의 권면은 간사에서나 부정에서도 난 것이 아니요’(살전 2:3)
3) 바른 교훈으로 해야 한다.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딛 1:9)
4) 한두 번 훈계 한 후 멀리 해야 할 경우도 있다.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 멀리하라’(딛 3:10) 여기에 ‘이단’이라는 표현은 우리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 안에서 교제를 원치 않고, 우리가 아닌 다른 집단에 속하려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가 모든 그리스도 안의 성도들과 사랑과 용서와 교제를 거부한다면 더 이상 우리에게 속하지 않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수님의 교훈에서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 18:15~17)고 하셨다. 우리가 용서를 먼저 구하고 집단 안에서나 개인적으로 진정한 교제를 다시 회복시키는 것이 우리의 해야 할 일이다. <계속>
김석원 목사
국제기도공동체(GPS, Global Prayer Society) 세계주기도운동연합 설립자 및 대표
CCC 국제본부 신학대학원 교수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