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일용할 양식(Daily Bread)이란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말 개역 성경에 ‘일용할’이란 말을 헬라어 성경에서는 ‘에피우시스’(επιούσιος)라 기록한다. 이것은 주기도문에만 나타나고 신약 다른 곳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 독특한 낱말이므로 단정적으로 해석하기가 아주 어렵다. 주기도문의 근본정신과 뜻을 혼동하게 하기도 하지만 필자는 두 가지 견해를 소개하고 싶다.

첫째, ‘에피우시우스’(επιούσιος)는 전치사 에피(επι : 위)와 우시아(ούσια : 존재 또는 본질)의 합성어로서 ‘존재의 필수적인 것’(necessary for existence)이란 뜻이다.

둘째, 에피(επι)와 우산(ουσαν = ημεραν : 날)의 합성어로서 ‘오늘을 위한’(for the current day, today)의 뜻이다. ‘오늘을 위한 양식’과 존재, 즉 ‘생존에 필요한 양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여겨진다.

기도
▲오늘, 매일 이미 우리 손에 좋은 것이 풍성하게 공급되어 있을지라도 계속, 진심으로 하나님께 일용할 양식을 간청하는 것이 합당하다. 만일 하나님께서 축복을 거두신다면, 현재 내게 공급되어 있는 풍성한 것일지라도 갑자기 아무런 예고 없이 없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unsplash
시간에 관해서는 내일이나 종말적인 미래가 아닌 ‘오늘’로, 양식의 내용 및 분량에 관해서는 생존에 필요한 만큼 최소한도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개역 성경에 ‘양식’이란 단어는 헬라어 성경에 ‘아르토스’(αρτοτ : 양식)로 기록한다. 본문의 ‘톤 아프톤 헤-몬’(τον αρτον ημωυ)은 문자적으로 우리의 빵(Our Daily Bread)이 무엇을 뜻하느냐에 대하여 몇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 육신에 필요한 육적 양식이란 것이다. 칼빈이나 루터는 육적 양식이라는 견해를 가진다. 루터는 이 일용할 양식을 광범위하게 해석했고 “일용할 양식이란 육신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인데, 즉 음식과 의복과 가옥과 가정, 전답, 가축, 금전, 기타 여러 물건과 배우자, 자녀들, 일꾼들, 또는 경건하고 진실한 지도자, 훌륭한 정부, 적당한 기후, 평화, 질서, 건강, 명예, 선한 친구, 믿을 만한 이웃 등을 말한다”라고 했다. 여기서 ‘아르토스’를 우리말 성경에서는 ‘빵’(bread)으로 번역했다. 이것은 넓은 뜻으로서 식물 전체를 말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의식주에 공급되는 물질을 뜻한다. 주기도문의 넷째 간구에서 예수님은 본인 자신이 인간 현실에서 체험하신 바대로 인간의 현실에 깊은 관심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최소한도 육신에 소용되는 양식은 인간의 삶에 충분조건은 아닐지라도 필요조건임을 드러내 주셨다.

둘째, 일용할 양식을 예수님의 성만찬으로 해석하기도 한다(요 6:33~35). 이 양식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의 피와 함께(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요 6:35) 언급되므로 성례(Sacrament)를 위한 기도라고 했고, 초대교회에서는 매일 성찬식(Daily Communion)에서 쓰이기도 했다. 성례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참된 생명이 됨을 포함하기도 한다.

셋째, 하늘나라의 떡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 되도다 하니’(눅 14:15)라고 기록했다. 메시야가 오시면 그의 택하신 백성들에게 큰 잔치를 베푸시는데, 이 간구는 메시야 잔치에 참여시켜 주기를 바라는 내용으로 보았다.

넷째,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떡’으로 해석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요 6:3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요 6:55)라고 예수님은 자신을 비유적으로 말씀하셨다. 이 생명의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도 해석했다.

이상과 같이 정리해보면 일용할 양식은 육적인 양식, 영적인 양식, 영육간의 양식으로 언급된다. 우리 육신의 양식은 생명을 지속하게 하는 것인데, 생명에는 육신의 생명이 있는 동시에 영의 생명이 있다. 영적 양식과 육적 양식, 이 두 가지는 마땅히 간구할 것이다. 때문에 본문에서의 청원은 좁은 뜻으로는 육신의 양식을, 넓은 뜻으로는 영적 양식을 다 같이 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5. 넷째 간구에서 ‘주옵소서’란 의미는 무엇인가?

마태복음의 주기도문과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에서 사용되고 있는 우리말 성경에는 ‘주옵소서’라고 같은 동사로 번역했다. 그러나 헬라어 성경에는 의미의 차이가 있다. 마태복음의 경우에는 ‘도스’(δσς)이고, 누가복음의 경우에는 ‘디두’(διδου)이다. ‘도스’는 ‘디도미’(διδωμυ : 주다)의 단순 과거 명령형으로서 일회적인 동작을 말하는데, 누가복음의 경우는 현재 명령형으로 반복적인, 또는 세속적인 동작을 말한다.

이 마태의 과거형 동사와 누가의 현재형 동사는 각 복음서에 기록된 ‘주옵소서’의 동작을 수식하는 마태복음의 ‘세메론’(σημερον : 오늘)이란 부사와 누가복음의 ‘카데메란’(καθημεραν : 날마다)이란 부사와 잘 조화를 이룬다. 필요한 양식을 마태복음에서는 오늘 한 번 ‘주옵소서’라고 계속해서 청원하는 것으로 본다. 그리스도는 주기도문의 이 청원에서 하나님은 오늘날(TODAY), 주시는 손(GIVE HAND)을 가지고 계심을 확신시켜 준다.

1) 하나님은 오늘날(TODAY), 매일(DAILY), 주시기(GIVE)를 기뻐하신다.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으나’(사 46:10)

2) 하나님은 오늘날, 매일 구원과 능력을 베풀어 주시기를 원하신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사 59:1)

3) 하나님은 오늘날, 매일 의롭게 살아가려는 사람을 붙들어 주시기를 원하신다.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시 37:24)

4) 하나님은 오늘날, 매일 성도들을 도와주시기를 원하신다.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시 41:10)

5) 하나님은 오늘날, 매일 우리가 겸손할 때 높여 주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

6) 하나님은 오늘날, 매일 성도들에게 일용할 식물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이것들이 다 주께서 때를 따라 식물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주께서 손을 펴신즉 저희가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시 104:27~28)

이와 같이 이 청원에서 우리는 ‘주옵시고’(give, 주다)라는 단어로부터 이생의 좋은 것들은 하나님의 선물(gift, 은사)이라는 것으로도 정리해 볼 수 있다.

그는 창설자와 증여자이시고, 현세적인 물질들을 위해서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는 것이 합당하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 날마다의 필요를 위해 간구해야 한다.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잠 30:8)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 청원에서 ‘그것을 우리에게 주시옵소서. 나에게만 아니라 나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에게도 주시옵소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이웃들을 돌아보게 하며 주변에 어려운 환경에 처한 가난한 자, 궁핍한 자와 우리 집안 식구들과 영적인 식구인 성도들을 위해 드리는 비이기적인 기도가 되는 것이다.

6. 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해야 하는가?

1) 오늘, 매일 이미 우리 손에 좋은 것이 풍성하게 공급되어 있을지라도 계속, 진심으로 하나님께 일용할 양식을 간청하는 것이 합당하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축복을 거두신다면, 현재 내게 공급되어 있는 풍성한 것일지라도 갑자기 아무런 예고 없이 없어질 수 있다. 가령 재난이나 자연적인 화를 만난다거나, 불이 났을 경우 풍족이 공급되어진 것일지라도 잿더미가 될 수 있다.

2) 오늘, 매일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이것들이 다 주께서 때를 따라 식물 주시기를 바라나이다’(시 104:27)

3) 오늘, 매일 우리가 노동이나 상업적인 수단을 통해 많은 물질적인 것이 우리의 것이 된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게 노동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4) 오늘, 매일 우리 인간들이 육체적인 연약함으로 인하여 계속해서 건강을 주시지 아니하면 그 건강을 유지할 수 없고, 인간의 육적인 결핍을 하나님께서 채워주셔야 하기 때문이다.

5) 오늘, 매일 우리의 현세적인 삶에서 아무도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잠 27:1)

6) 오늘, 매일 우리는 미래에 대한 모든 염려를 다 극복해야 하므로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겠다는 신앙의 고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마 6:34)

7) 오늘, 매일 우리는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우리가 가진 것이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기 때문이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 24:1)

8) 오늘, 매일 우리는 이 기도를 통하여 이기적으로 자기만을 위해 기도할 수 없음을 배우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이기적인 기도의 대표적 기도이다.

9) 오늘, 매일 우리의 자연적인 존재인 그 생명이 필요한 양식과 즐거움을 위해 구하는 것은 그것이 영적인 행복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10) 오늘, 매일 우리에게 필요하고 정확한 일용할 양식을 아시는 분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뿐이기 때문이다.

7.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는 청원이 내일이나, 미래를 위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미리 준비해 둘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는가? 미래를 위해서 물질을 준비하는 것은 비성경적인가?

우리는 미래와 후손을 위해 필요한 것을 잘 활용하고 절약해서 저축하는 것은 긍정적인 측면에서 수용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장래를 위해서 큰 재산을 어떻게 쌓을 수 있을까 하여 우리의 정신을 불안하게 하거나 스스로 괴롭혀서는 안 된다.

그러나 미래를 위하여 저축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다윗은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필요한 재물을 저축했다. ‘내가 이미 내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힘을 다하여 예비하였으니’(대상 29:2) 바울은 교회를 방문할 때 미리 헌금을 하도록 요청했다. ‘너희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으니’(고후 9:5) 장래를 위해 교회의 헌금이나, 개인의 물질을 모으는 일은 성경적인 태도인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사욕과 정욕을 위해 축적하는 것은 악의 뿌리를 심고 키우는 것과 같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딤전 6:10)

우리는 이 청원의 진정한 뜻을 통하여, 물질적인 필요를 구해야 한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이며, 신성한 노동을 통한 직장 생활, 양심적인 기업주와 노동자들의 정당한 분배가 있는 곳에서 진정한 응답을 하실 것을 기대한다.

8.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는 청원은 감사하는 신앙의 고백으로 드리는 것이어야 한다.

이 청원 속에는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는 신앙의 능력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많은 ‘일용할 양식’을 사용함으로써 감사를 표현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재물을 주시고 그 물질로 주님을 공경하는 감사의 표현을 원하신다(잠 3:9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진정한 감사에는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교만한 자세가 섞일 수 없다(잠 30:9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할까 하오며…). 오직 ‘필요한 양식’을 구하는 겸손한 자는 이렇게 간구한다.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잠 30:8)

교만한 자는 결코 감사하지 않을 것이다. 교만은 감사의 흐름을 정지시킨다. 교만한 자는 자기가 일용할 양식(필요한 양식)을 받은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이 획득한 것으로 자기 능력을 과시할 수 있다.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은 지극히 작은 것까지라도 하나님의 선물로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때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이 청원을 통해 육적이고, 물질적이고, 영적인 모든 축복에 대해서 찬양과 감사를 드릴 때, 이 간구의 진정한 의미와 같은 호흡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결론

필자의 서재 책상 위에 원고지와 함께 『렘브란트』의 명화가 있다. 이 그림은 검소한 식탁 위에 빵(bread)과 국(soup)이 놓여있고 덥수룩한 횐 수염의 노인이 작업복 그대로 식사 전에 두 손을 모아 이마에 대고 기도하는 경건한 모습의 그림이다. 이 그림은 예수 그리스도의 식전감사(食前感謝)의 모습을 비유하여 그린 것이라고 전해온다. 이 그림이 던져주는 의미를 살펴볼 때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는 우리 기도의 자세는 어떠한가? 필자는 주기도문 연구 논문에서 이 청원을 어떤 자세와 내용으로 드리는가에 대한 응답자 가운데 67.2%는 항상 응답해 주신다고 했고, 나머지 32.8%는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여기서 얻어진 결과를 검토해 볼 때 주기도문을 드리는 10명 중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할 수 있는 3~4명은 이 글을 대하는 기회를 통하여, 이 청원에 대한 확신이 설 수 있기를 기대한다. 우리가 잘못된 기도자의 자세에 서 있다면 야고보 기자의 권면, 즉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라’(약 4:3)는 말씀을 통하여 바로 잡히기를 원한다.

일용할 양식은 우리들의 삶의 물질이다. 그 물질을 주시는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그 물질에 대한 우리들의 간구는 ‘주옵소서’(give)이다. 구하는 사람은 누구(Who)인가? 우리이다. 언제(When) 달라고 하는가? ‘오늘날’이다. 마태복음에 기록된 ‘오늘’처럼 오늘에 이 간구를 드리며, 누가복음에 기록된 ‘날마다’처럼 매일 이 간구를 끊임없이 드리자. 초대교회의 경건한 신자들은 아침에는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을 드리고, 저녁에는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을 외웠다고 한다. 이 청원이 비이기적이고 겸손한 개인의 간구에서 시작되고, 가정예배의 제단으로 연결되며, ‘우리’라는 세계 지구촌의 모든 자가 하나님께 일용할 것을 구할 때 모든 필요가 응답되기를 기원한다. <계속>

김석원 목사
국제기도공동체(GPS, Global Prayer Society) 세계주기도운동연합 설립자 및 대표
CCC 국제본부 신학대학원 교수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