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은혜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예수님의 용서 배워야
성령께서 깨우쳐 주신 것은 솔직히 고백하고 용서 구하길
‘믿음으로 사랑’하여 진실하고 용기 있는 용서 실천해야

8. 어떻게(How) 우리는 용서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방법을 추구해야 한다. 모든 용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님의 충만한 능력 안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을 배울 때 가능하다.

1) 끊임없는 용서를 해야 한다. 베드로가 용서에 대하여 주님께 질문을 했을 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 18:22)고 하셨다. 이어서 빚을 탕감받는 자의 용서를 비유로 설명하셨다.

2) 진실된 마음으로 용서해야 한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35)고 하셨다. 진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도 그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진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않는 기도는 ‘…그의 기도가 죄로 변하게 하시며’(시 109:7)라는 양심의 가책 없는 기도의 결과를 초래한다.

진심으로 용서의 기도를 드릴 수 없을 때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예배할 수가 없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진심으로 용서의 기도를 드릴 수 없는 사람은 오늘 내 죄를 용서해 달라는 주기도문을 드리기가 몹시 괴로울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마음이 편치 않아야 염치 있고 양심 있는 신자이다.

용서
▲진정한 용서를 구하기 위해, 성령께 의지해서 정직한 태도로 우리의 언어를 사용했을 때 용서의 열매를 맺게 된다. ⓒunsplash
3) 완전한 용서를 해야 한다. 하나님의 용서는 완전한 것처럼 우리도 완전한 용서를 해야 한다. 이 용서는 조건이 없는 용서이다. 성경에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시 103:3)라고 했다. 주기도의 본문에서 ‘죄를 사하여 준 것같이’라는 말 중에 ‘사한다’(Forgive)라는 동사 ‘아피에나이’(αφιεναι)는 헬라어 성경 마태복음 4장 22절에 나오는 단어와 똑같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께서 부르실 때 그를 따르기 위해 그물과 배를 ‘내버렸다’. 이 동작을 나타내는 단어를 주기도문에서도 같은 헬라어로 사용하고 있다. 용서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완전히 내버리는 것과 같다. 우리가 쓰레기통에 찌꺼기들을 버릴 때는 미련을 갖지 않고 완전히 버린다. 그런데 때로 우리는 용서하지 못하는 쓰레기를 담고 고약한 냄새와 함께 산다. 어떤 쓰레기를 조금 뒤에 버린다고 남겨 놓을 때 더러운 냄새는 계속 제거할 수 없다. 버릴 것은 완전하게, 깨끗하게 버리는 것처럼, 완전하게 용서할 수 있는 훈련이 필요하다.

사실 완전하게 용서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계속 치밀어 오르는 분노, 계속 용서할 수 없는 연약함이 우리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용서해야 한다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한계가 있다. 감당하기 힘든 일이다. 하나님의 완전한 용서를 배우라. 그리고 하나님이 완전히 용서하신 것처럼 용서해 보라. 그렇게 할 때 자신의 힘으로 용서할 수 없었던 모든 어려움은 극복될 수 있다.

4)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 사랑은 무조건적이어야 하고,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한다(고전 13:5). 사랑은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딘다고 했다(고전 13:7). 이런 사랑의 바탕 위에 세워질 때 그 용서는 무조건적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용서를 구할 때 화목과 화해의 두 기둥 위에 두어야 한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무조건 용서하려고 할 때 우리를 사용하시기 위해서 성령의 깨우침을 주신다.

5) 용서를 구할 때 우리의 언어는 빛 가운데서 숨김이 없는 정직함으로 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고하듯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신의 부족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용서를 구할 때 우리는 우리의 언어까지도 성령님께서 주장하시도록 그분을 의지해야 한다. 우리가 용서를 구할 때, ‘어쩌면 제게 잘못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제게 잘못이 있다면…’이라는 표현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우리는 성령께서 잘못했다고 깨우쳐 주신 것은 솔직히 고백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범한 잘못을 축소하거나 적당히 넘어가려고 해서는 안 된다. 대개의 경우 상대방에게 용서라는 말 대신 솔직하지 못한 다른 넋두리나 답변을 하기가 일쑤이다. 가령 ‘아, 뭐 아무것도 아닌 걸 가지고 그러십니까?’ 혹은 ‘저도 잘 모르고 한 걸요, 뭐’ 또는 ‘별걱정을 다 하시는군요. 너무 염려 마십시오’ 등은 용서를 구하는 바른 태도라 볼 수 없다.

또한 잘못된 고백으로 우리의 죄를 가볍게 하거나 상대방을 무색하게 하는 때가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가령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당신이 생각하는 꼭 그런 사람은 아닙니다. …제가 잘못한 건 사실이지만 당신도 (이런, 저런) 잘못을 범했습니다. 그래서 저도...’라고 하는 식의 말투는 진짜 잘못은 자신에게 있는 게 아니라 상대방에게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 ‘…제가 왜 그렇게 했는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도 저와 같은 입장에 있었다면 틀림없이 저와 같은 행동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별로 큰 잘못을 범하지 않은 게 다행입니다. …그냥 신경 쓰지 마시기 바랍니다’고 말하는 것은 상대방이 그 일을 마음에 두고 있든 아니든 본인은 상관없다는 말투이다. 이런 식의 말투도 바른 태도라 볼 수 없다. 진정한 용서를 구하기 위해, 성령께 의지해서 정직한 태도로 우리의 언어를 사용했을 때 용서의 열매를 맺게 된다. ‘언어에 조급한 사람’(잠 29:20)의 자리를 피하는 삶의 지혜를 간구할 때 이 청원은 더욱 그 빛을 드러낼 수 있다.

6) 가시 돋친 용서는 용서가 아니다. 가시 돋친 용서란 무엇인가? 예를 들면 ‘000씨가 권하니까 일단 용서는 하지만 당신이 나에게 준 상처는 결코 잊지 못할 거야’라는 식의 용서이다. 이것은 용서가 될 수 없다. 무디 선생(D. L Moody)은 이것을 ‘고슴도치 용서’라고 했다. 매튜 헨리(Matthew Henry)는 “겉으로는 평화스럽고 화해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많으나 용서에는 적의를 품어서도 안 되며, 누구에게 악한 감정을 가져서도 안 된다. 어떤 형식으로든지 복수하려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피해를 입히고 화나게 한 사람의 행복을 진심으로 원하며 추구하는 마음의 자세가 아니면 안 된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한 것처럼 보이고, 또 화평한 것 같이 보여도 중심에는 악한 감정이 있거나 불만이 있거나, 시기 질투에 의하여 상대를 나의 중심에서 경계하는 것이 있으면 그 용서가 모두 가시 돋친 고슴도치 용서인 것이다.

7) 상대방을 진심으로 ‘이해’해 주려는 태도를 통하여 용서의 문을 열어야 한다. ‘이해’라는 용어는 영어로 ‘understand’라고 한다. 이 단어는 ‘아래 선다’라는 말이다. 겸허하고 겸손한 태도로 상대방을 대하는 자세이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서는 것이다. 상대방이 어려울 때, 곤경에 처할 때, 그런 입장이나 경험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남의 사정도 모르고 비난하는 경우가 많다.

8) 용서는 용서한 후 용서할 수 없었던 모든 사실을 잊어버려야 한다. 스펄전 목사는 ‘용서’에 대하여 아주 유머러스하고도 의미심장한 표현을 하였다. “용서하고 잊어버리십시오. 당신이 미친개를 땅에 묻을 때 꼬리만 땅 위로 기념탑처럼 남겨 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라고 한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옛날에는 미친개를 끌어다가 산채로 땅에 묻었던 것으로 본다. 버림받고 제구실도 못하고, 위험하기까지 한 개를 묻을 바에는 완전히 묻어 버려야지 땅 위에 꼬리만 남겨 둘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우리가 타인의 죄를 용서한 후 완전히 잊어버려야지 일부분을 다시 기억하고 남겨 놓아서는 안 된다. 잊어버리지 않는 용서의 꼬리들이 이곳저곳에서 흉한 모습을 드러내는 현장들이 사라져야 한다.

9) 용서는 믿음으로 사랑을 시작할 때부터 가능해진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사랑하는 훈련을 통해서 용서가 실천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가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 신앙이 성숙하는 것은 각자의 믿음의 분량과 비례한다.

믿음의 대헌장을 기록한 로마서 1장 17절은 모든 사람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비결은 ‘오직 믿음’으로 가능케 됨을 언급했다. ‘용서’가 점점 부재하여가는 탁한 세상에서 ‘믿음으로 사랑’하여 용서할 수 있는 진실하고 용기 있는 용서가 필요하다.

10) 용서를 베푸는 삶을 생활화(습관화) 해야 한다.

(1) 용서를 베푸는 습관은 건강한 정서 생활을 하는 데 꼭 필요한 요소이다.
(2) 용서를 베푸는 습관은 복음 전도사역을 더욱 효과적으로 감당하게 할 수 있는 요소이다.
(3) 용서를 베푸는 습관은 교회 생활에 성도간의 교제를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요소이다.
(4) 용서를 베푸는 습관은 성공적인 결혼 생활과 건전한 가정생활에 꼭 필요한 요소이다.
(5) 용서를 베푸는 습관은 능력 있는 기도 생활에 꼭 필요한 요소이다.
(6) 용서를 베푸는 습관은 성령 충만한 삶에 꼭 필요한 요소이다.
(7) 용서를 베푸는 습관은 믿음의 담력을 갖게 하는 데 꼭 필요한 요소이다.
(8) 용서를 베푸는 습관은 용서의 삶을 훈련시키는 데 꼭 필요한 요소이다.
(9) 용서를 베푸는 습관은 영혼의 기쁨과 감사가 넘치게 하는 데 꼭 필요한 요소이다.
(10) 용서를 베푸는 습관은 겸손과 온유한 인격으로 성장시키는 데 꼭 필요한 요소이다.
(11) 용서를 베푸는 습관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가게 하는 데 꼭 필요한 요소이다.
(12) 용서를 베푸는 습관은 사단 마귀의 영역을 좁히는 데 꼭 필요한 요소이다.

결론

기독교의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에서 실현된 용서의 복음이다. 인간을 위한 두 번째 청원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 청원이 차지하는 문맥의 위치(Where)와 죄는 무엇이며(What), 죄를 용서해야 할 이유(Why), 또한 용서를 구하는 삶은 어떻게(How) 하느냐에 대해서 질문의 형태로 살펴보았다. 죄인을 위한 용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삶의 전부를 준 것이었고, 그 용서를 위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를 마태복음 6장 14절에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 주기도의 정신과 생활화가 신자들의 의식구조 속에서 어떻게 접목되고 있는가 하는 필자의 연구 논문의 사례에 67.2%가 긍정적인 응답을 보여 주었다. 이런 결과를 통하여 10명 중에 3~4명은 용서의 삶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증오의 마귀는 우리의 육체와 정신 건강과 영적인 건강을 해치며 성도의 가정과 그 모든 것을 파괴시키며, 믿음과 성령 충만한 삶을 송두리째 빼앗아간다. 그 영혼은 불안과 슬픔으로 지옥처럼 채우고, 교만과 오만으로 사단이 춤을 추는 무대장으로 전락시키고 만다.

그러나 용서할 때 마귀는 한 길로 왔다가 열 길로 도망갈 것이고, 용서할 때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이 된다. 날마다 양식(daily bread)을 구하는 것처럼 날마다 용서(daily forgiveness)를 생활화하여 ‘오늘은 내가 죄 용서해 달라고 주기도문을 드리기가 몹시 괴롭고, 마음이 편안치 않다’라고 고백하지 않아도 될 만큼 맑고 솔직하고 진실한 양심으로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양심의 가책 없이 이 청원을 드릴 수 있는 삶이 되길 기대한다. 정직한 신앙의 척도는 용서의 삶을 삶의 현장에 옮겨 그곳에서 생활화하고 실천하는 현재와 미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계속>

김석원 목사
국제기도공동체(GPS, Global Prayer Society) 세계주기도운동연합 설립자 및 대표
CCC 국제본부 신학대학원 교수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