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세 파로 나뉜 지식인(知識人)들

우리 민족의 커다란 약점 가운데 하나는 분열된 사고에 있다. 사람들은 지방에 따라 결속하는 힘이 특별하다. 빈부에 따라, 학벌에 따라 자연스럽게 나뉘어 사회적 통합(統合)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통합은 장차 우리 민족의 커다란 숙제 가운데 하나이다.

개신교(改新敎)의 선교가 본격화된 19세기 말, 우리 민족은 개방과 개혁이라는 보다 분명한 과제를 안고 있었고, 그 방법과 방향을 둘러싸고 보수, 진보 간에 커다란 갈등을 빚고 있었다1).

이른바 위정척사파(衛正斥邪波)와 동도서기파(東道西器派)와 급진개화파(急進開化派)이다. 그들은 밀려오는 서양문명과 기독교 수용문제에 관하여 서로 다른 입장을 보여주었다. 기독교는 결국 김옥균, 서재필, 윤치호, 유길준, 이승만과 같은 급진개화파에 속한 사람들로부터 시작되고 수용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곳에서는 이처럼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세 파의 견해와 입장을 잠시 살펴보자.

위정척사파의 대표 인물 최익현
▲위정척사파의 대표 인물 최익현 2, 3
1) 위정척사파(衛正斥邪波)

이항로, 최익현 등으로 대표되는 이들은 기독교(基督敎)는 오랑캐의 종교이며, 우리의 고유문화 전통과 미풍양속을 해치는 위험한 종교로 보았다. 기독교의 전래(傳來)를 결사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한 이들은 당시로서는 정학(正學)인 유학(儒學)을 보위(保衛)하며, 유교 이외의 종교나 사상, 특별히 기독교는 대표적인 이단(異端), 사학(邪學)으로 보고 이를 맹렬하게 반대하였던 것이다.

이들의 출현은 1880년을 전후한 개화 사상가들이 나타남과 때를 같이한다. 이들의 이런 주장이 18세기 이후로 조선에서 꾸준히 일어났던 천주교 탄압의 이데올로기 구실을 하였다. 19세기에 들어오면서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2),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3) 등 서구 세력의 강력한 도전을 받으면서 국민에게도 호응을 받게 되었다.

이들이 말하는 위정(衛正)의 뜻은 조선의 우월한 전통문화와 정신적 가치를 보존하자는 것이고, 척사(斥邪)란 서양의 침략적인 야욕과 그 사악한 사상을 물리칠 뿐 아니라 그들의 기술과 상품까지도 배척(排斥)하자는 것이었다. 막강한 서세동점의 마당에서 서세의 문화, 기술 상품을 받아들이면 우리가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것이 더 많다고 판단하였다. 더욱이 이들은 이웃 나라 일본이 서양화하더니 침략세력이 되었다고 날카롭게 관찰하여, 일본의 침략까지도 경계하고 투쟁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서양문물의 전래와 침략을 계기로 조선왕조 500년의 유교적 전통질서와 민족을 보존하는 길은 오로지 척사(斥邪)에만 있다고 판단하였다4).

그들의 극단적인 보수성은 문제가 될 수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자주독립(自主獨立) 의지와 강력한 문화적 민족주의와 항일(抗日)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공로는 인정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이들은 구한말에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여 의병운동(義兵運動)을 전국적으로 일으켰다. 우리 민족의 독립을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던 것이다.

2) 동도서기파(東道西器派)

이들은 온건개혁파(穩健改革派)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나라의 문호를 개방하고 우선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자고 주장하는 부류였다. 서양의 문물을 수용하고 나라를 개화함으로 국가의 자주, 부강을 이룩하여 국제사회에 진출하자는 적극성을 띤 집단을 말하는 것이다. 개화의 방법을 두고 둘로 나뉘어 대립하는데, 하나는 지금 말하는 동도서기파로 이들은 온건한 개화파였으며, 다른 하나는 급진개화파에 속하는 개화당 사람들인데, 이들은 당을 조직하여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려고 시도한 집단이었다.

결국 조선은 이 개화파에 의하여 기독교가 수용되는데, 그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는데 더욱 적극적이었다. 동도서기파는 위정척사파와는 달리 언제까지나 나라의 문을 걸 수는 없다고 판단하여, 개화는 하고 또 개항도 하되 척사파들이 말하는 우리의 우수한 고유전통 문화와 사상 및 가치관은 고수하면서 서양의 우수한 기술 문명만을 받아들이자는 입장이었다. 즉 도(道)는 동양이고, 기계기술은 서양의 것을 받아들이자는 것이었다. 급진개화파의 입장에 있던 한학자이며 목사인 최병헌은 이들의 논리적 모순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저들은 말하기를 서양의 기계는 취하고 쓸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도 서양의 종교는 숭상할 수 없다고 하여서 그것을 이단으로 지적하여 버리니, 그것은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개 대도(大道)는 우리나라에 한정된 것이 아니고, 우리나라나 외국에 다 통할 수 있으니 서양의 하늘은 동양의 하늘이고 천하를 보기를 한 현상으로 보며, 사해(四海)는 가히 형제라고 일컫는다.”5)

최병헌은 뿌리 없는 나무나 열매는 생각할 수 없듯이, 기독교가 없는 서양의 기술과 문명은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그는 이미 기독교와 서양문명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것을 감지하였다. 따라서 뿌리 없는 나무는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갈파한 것이다. 최병헌은 뿌리에서 난 열매가 아름다우니 그 열매만 취하고 뿌리는 버린다고 하는 이 이론이 얼마나 모순된 것인가 하는 것을 바로 지적한 것이다.

급진개화파의 대표 인물 김옥균
▲급진개화파의 대표 인물 김옥균
3) 급진개화파(急進開化派)

동도서기파에 속한 사람들과는 달리, 개화당 인사들은 바깥세상에 대해서는 대단히 개방적이고 긍정적인 데 비해 조선에 대하여는 비판적이고 부정적이었다. 이들은 김옥균 등의 급진개화파로, 개화당의 정치적 목적은 당시 수구당이 군림하고 있던 정부와 양반관료 제도를 타파 또는 혁신하고 근대적 민족국가를 수립하는 데 있었다. 기성 당파와는 달리, 양반 출신만 아니라 중인(中人), 무관(武官), 승려(僧侶) 등 출생 신분에 구애됨이 없이 광범위하게 사회의 각계각층이 참여하는 근대적 성격을 띤 정치집단을 형성하려는데 있었다.

여기서 개방적이라 한 것은 서양의 제도와 기술 문화만 아니라, 그들의 종교에 대해서도 그러했다. 즉 개화를 하자면 적극적으로 철저히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외국의 것을 받아들이려면 선별하는 것이 아니라, 이 민족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은 무조건 받아들이자고 주장했다. 이들은 기독교에 접근하며 그 교리나 사상을 알아보았고, 그 결과 기독교의 효율성도 인정하고 있었다.

급진개화파의 대표 인물 서재필
▲급진개화파의 대표 인물 서재필
이들은 기독교를 신봉하지는 않았으나 기독교가 가진 잠재력과 역사적 효율성을 인정하였다. 이들은 조선의 기독교 수용에 적극성을 보였다. 결과적으로 이들에 의하여 기독교가 조선에 수용되게 된 것이다. 이들은 국민 생활에 있어서 종교의 의미와 그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종교가 흥(興)하여야 국가도 흥한다는 이론을 편 것이다.

맥클레이 박사 부부가 1884년 6월 말경에 서울에 와서 고종 임금으로부터 미감리교회의 교육 및 의료 선교의 윤허를 얻어내려고 하였을 때, 바로 김옥균이 중간에 나서서 윤허를 얻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다시 말하면 이미 위에서 언급한 급진개화파에 속한 사람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6). <계속>

[미주]
1) 이덕주, 『서울 연회사 I』, p. 32.
2) 병인양요, 1866년(고종 3) 프랑스가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고자 강화도를 침범함으로써 일어난 사건.
3) 신미양요, 1871년(고종 8) 미국 함대가 조선에게 통상조약체결을 강요하기 위해 강화도를 침략한 사건.
4) 송길섭, 『배재 백년사 1885-1985』, p. 8.
5) 황성신문,1903년 22. ,『배재 백년사 1885-1985』에서 재인용 p. 8-9.
6) 송길섭, 『배재 백년사 1885-1985』 에서 재인용 p. 11.

김낙환 박사(아펜젤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전 기독교대한감리회 교육국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