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아펜젤러와 함께 온 선교사들과 가족들의 입국
1884년 12월에 있었던 갑신정변의 여파로 보수파가 주도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1885년 봄 부활절에 미감리교회의 아펜젤러 내외와 미북장로교회의 언더우드가 선교사로 조선 정부의 허락을 받고 정식 입국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에 갑신정변이 일어난 후 4개월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국(政局)은 불안하였고, 미국에서 온 선교사들의 입국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에 혼자 입국하였던 언더우드는 바로 서울로 입경하였으나, 아내를 동반하고 입국하려던 아펜젤러는 입국이 거절되어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한 달 후 스크랜턴이 다시 홀몸으로 들어오고, 그 후 두 달이 지난 후에야 아펜젤러 내외와 스크랜턴의 어머니, 그리고 스크랜턴의 아내와 어린 딸이 차례로 입국하게 되었다.
스크랜턴은 1856년 5월 29일 미국의 코네티컷주의 뉴헤이븐(New Haven)에서 아버지 스크랜턴(William T. Scranton)과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Mary T. Scranton)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때 뉴헤이븐에서 제조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스크랜턴은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신앙의 영향을 크게 받았는데, 그의 외할아버지는 저명한 미국감리교회의 목사였다. 스크랜턴이 16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이후 더욱 어머니의 경건한 신앙의 감화 아래 성장하였다.
그는 고향에서 중등교육까지 마치고, 미국의 명문대학의 하나인 예일대학을 1878년에 졸업하였다. 그리고 의사가 되기 위하여 지금의 컬럼비아대학의 전신인 뉴욕의 내·외과 의과대학(The New York College of Physicians and Surgeons)에 입학하여 전문적인 의학훈련을 받고 1882년 졸업하였다. 그는 곧 클리블랜드(Cleveland)에서 개업하였고, 목사의 외손녀였던 루이스 암스(Miss Louise Arms) 양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스크랜턴은 그의 경건한 어머니의 신앙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는 개업 의사로 있으면서도 기회만 오면 의료 선교사로서 일해 보려는 자신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어렵게 배운 의학 공부인데, 이 지식과 경험을 해외에 있는 가난하고 무지한 이방 민족을 위하여 봉사하는 데 사용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병석에 눕게 되었다.
스크랜턴은 외로운 병상에서 병마와 싸우는 과정에서, 비로소 하나님께 자신을 헌신하게 되었다. ‘하나님, 나의 병이 회복되는 대로, 곧 의료선교사로 자원하여 내 지혜와 경험을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고백을 하고 난 후 이상하게도 스크랜턴의 병은 빨리 회복되어 다시 건강을 되찾게 되었다. 그는 더는 지체없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실천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바로 그때 미감리교 선교부에서 한국에서 일할 의료선교사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뉴욕에 있는 감리교 선교부에 의료 선교사 지원서를 제출한 것이다1).
스크랜턴은 선교부로부터 선교사로 임명을 받았다. 그리고는 곧바로 개업하던 때 사용하던 수술 기구와 중요한 의료 기구들과 약품을 포장해서 조선에 배편으로 부치게 되었다. 그리고 일정에 따라 1884년 12월 4일 파울러 감독에게 조선 선교를 위한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2). 같은 날 한국에서는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나 많은 사람이 피를 흘렸는데, 스크랜턴은 이처럼 피 흘리고 병든 조선인들의 육신과 심령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종인 목사로서 조선땅을 변화시키고자 한 것이다.
스크랜턴의 한국 이름은 시란돈(施蘭敦)이다. 조선에 도착한 이후로 처음 몇 달 동안은 북장로의 선교사인 알렌(H. N. Allen)을 도와 제중원(濟衆院)에서 의료사업을 하다가, 1885년 9월 10일 정동에서 민간 의료기관으로 진료소를 열어 1886년 6월 15일 시설을 갖추고 병원 이름을 시병원(施病院, Universal Hospital)3)이라고 하였다. 그의 이름인 시란돈에서 ‘시’(施) 자를 딴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시’(施) 자의 그 의미대로 베푸는 병원이라는 이 이름은 고종이 지어준 것이다. 그 후 다시 1887년 동대문에 부인전문병원인 보구여관(保救女館)4)을 설치했으며, 1894년 남대문 근처 빈민 지역인 상동으로 병원을 옮겼다.
그는 특히 전염병에 걸려 버려진 환자를 데려다가 치료하고, 고아들을 돌보았다. 스크랜턴의 선교병원은 부녀자와 어린이 치료를 전문으로 하게 되었고, 여의사들의 도움으로 오늘날 이화(梨花) 여자대학교 부속병원과 의과대학으로 발전하였다.
그 밖에 스크랜턴은 한글 성서번역위원회의 번역위원으로서 성서 사업에도 큰 공헌을 하였고, 시병원의 환자들을 중심으로 상동교회5)를 개척하여 설립하였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 된 자에게 해방을, 억눌린 자에게 평안을!’, 이것이 선교사로서 사역하던 스크랜턴의 신조 및 사명이었다고 한다6). <계속>
[미주]
1) 송길섭, 『상동교회 100년사』, p.26.
2) 위의 책, p. 27.
3) 지금의 정동제일교회가 서 있는 곳과 바로 이웃하는 자리, 선교백주년기념예배당의 서쪽 터전 일대는 원래 의료선교사 스크랜턴(William Benton Scranton, 施蘭敦, 1856~1922)이 자신의 첫 병원을 설치했던 공간이다. 스크랜턴이 우리나라에 도착한 것은 1885년 5월 3일이었는데, 서울에 먼저 들어와서 제중원을 개설하고 있던 알렌(Horace Newton Allen, 安連, 1858~1932)에게 의탁하여 이곳에서 잠시 일을 돕는 것으로 첫 임무를 개시하였다. 하지만 이내 의견충돌이 빚어져 둘은 결별하였으며, 스크랜턴은 미국공사관의 주선으로 정동에 독립가옥 두 채가 딸린 1,800여 평의 대지를 사들여 장차 서울에서 벌일 선교 활동의 근거지를 마련하는 일에 주력하였다.
곧이어 일본에서 대기하고 있던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亞扁薛羅, 1858~1902) 내외와 자신의 어머니인 메리 스크랜턴 부인(Mrs. Mary F. Scranton, 施蘭敦 大夫人, 1832~1909) 등의 일행이 뒤따라 들어오면서 새로 구입한 대지 가운데 성벽에 붙어 있는 서쪽 집은 아펜젤러 가족이 사용하고, 그 아래의 동쪽 집은 스크랜턴 가족이 터전을 잡기에 이르렀다.
다시 이들은 이곳을 거점으로 하여 ‘우리가 앞으로 사고자 원하는 소유지’로 지목한 정동 32번지 일대의 언덕을 그해 10월에 사들였는데, 이곳이 바로 이화학당(梨花學堂)이 들어서는 자리이다. 이러한 와중에 의사 스크랜턴은 미국에서 보낸 의료기기와 약품이 도착하자 1885년 9월 10일 우선 자신의 집에서 의료 활동을 개시하였다. 이듬해에는 다시 동쪽으로 붙은 집을 사서 이곳을 수리한 후 정식으로 병원을 열었는데, 이때가 1886년 6월 15일이었다. 아직은 시병원(施病院)이라는 이름조차 붙기 이전의 일이었다. 아펜젤러가 운영하던 작은 병원에 시병원이라는 이름이 내려진 것은 1887년 3월경이었다.
4) 1887년 11월에 문을 연 보구여관(保救女館, Caring for and Saving Woman’s Hospital)은 1885년 이래 이미 시병원을 개설하여 의료선교를 진행하고 있던 스크랜턴의 요청에 따라 만들어진 병원이었다. 그는 일찍이 남녀가 엄격히 구분되는 한국의 풍속 때문에 병이 난 여자를 남자 의사가 치료하기 곤란하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여성 해외선교회에 여의사를 파견하여 여자와 어린아이들만을 따로 치료할 수 있는 병원을 만들어 줄 것을 청원한 바 있었다.
이에 따라 1887년 10월 31일에는 그토록 원하던 여의사 메타 하워드(Miss Meta Howard)가 파견되었고, 이내 시병원과 이웃하는 자리에 보구여관을 설치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곧 조선 최초의 여성전용병원이자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부속병원의 모체가 된다. 보구여관이라는 이름은 흔히 명성황후에 의해 하사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에 대한 자세한 내력은 잘 알지 못한다.
보구여관에서는 이화학당의 여학생들은 물론이고, 그동안 쉽사리 의료혜택을 받지 못했던 일반 부녀자들과 아이들을 대상으로 진료를 개시하였다. 여의사 하워드는 도착한 그해에만 1,000명 이상의 환자를 치료할 정도로 과로에 노출되었다. 이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어 1889년에는 부득이 본국으로 돌아가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일시적인 공백을 다시 메운 것은 ‘홀부인’으로 유명한 여의사 로제타 셔우드(Rosetta Sherwood, 1865~1951)로, 그녀는 1892년에 윌리엄 제임스 홀(William James Hall)과 결혼하여 활동하였다.
5) 초대 의료선교사인 W. B. 스크랜턴이 1889년 상동약국을 세워 의료선교를 하면서 복음전도를 위해 설립했다. 상동약국은 1890년 상동병원으로 개편되었고, 상동교회는 1893년 정식 교회로 발족했으며 실질적인 목회는 노병일 전도사가 맡았다. 상동교회는 규모가 커지자 1895년 6월 현재의 한국은행 자리인 달성궁(達城宮)으로 옮겨져 병원과 분리되었다.
1907년에 상동교회의 속장(屬長)이었던 전덕기가 목사 안수를 받고 스크랜턴의 후임으로 담임목사가 되었다. 1905년 상동교회는 을사보호조약 무효의 구국기도회를 열면서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고, 이후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에서 민족운동의 기수 역할을 하게 되었다. 공옥(工玉)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사업을 통해 민족계몽에 앞장섰으며, 1906년에 조선 최초의 민간잡지인 〈가평잡지〉를 발행하기도 했다.
105인 사건으로 전덕기가 일제에 체포당하여 1914년 순직하자 상동교회의 민족운동은 큰 시련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김진호·이필주·최성모·현순 등이 전덕기 목사의 정신을 이어받아 3·1운동을 주도하는 등 지속적인 민족운동과 선교를 전개했다. 그 후 1944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쇄되었다.
상동교회는 그 입지적 조건으로 기업선교라는 새로운 형태의 선교 방법을 택해 1976년 12월 19일에 새로나 백화점과 함께 당시 최대 규모의 교회당으로 세워졌으며, 백화점에서 생기는 이윤은 모두 선교 사업에 사용하도록 했다. 또한 교육선교 사업으로 수원에 있는 삼일중학교와 삼일실업고등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상동교회는 서울특별시 중구 남창동에 있다.
6) 황규진 홍종만, 『인천 서북지방사』 p. 54.
김낙환 박사(아펜젤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전 기독교대한감리회 교육국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