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학당
▲초기 이화학당 건물. 스크랜턴 대부인과 어린 학생들이 보인다. ⓒ아펜젤러 사진첩
4. 당시 서양교육(敎育)에 관한 조선인들의 생각

서양 선교사들에 의하여 시작된 여학교는 조선인들이 가진 편견으로 인하여 학생들을 모집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대부분 조선인은 신교육의 필요를 절감했지만, 대부분 수구적인 일반인들의 이해는 아직도 냉담했다. 더욱이 서양 사람들의 학교나 병원에 가면 아이들의 눈을 빼서 약으로 쓴다는 낭설이 돌아 선교사들이 학생들을 모집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1886년 스크랜턴 대부인이 문을 연 이화학당에서는 학생을 구하기가 힘들어 천연두에 걸려 죽기 직전에 수구문 밖에 갖다 버린 아이들을 주워다 치료해 학생으로 들이기도 하였다고 한다1).

1890년 초까지는 대부분 부모가 자제들을 양학에 보내려 하지 않았다. 일찍 개화에 눈을 뜬 집안이나 허락하였고, 부모와는 달리 몰래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생겨났다.

스크랜턴 대부인
▲1886년 이화학당을 설립한 메리 스크랜턴 대부인
스크랜턴 대부인은 학생이 없어서 기다리다가, 일 년 만에야 첫 번째 학생을 만났다. 하인을 거느리고 한밤중에 이화학당을 찾아왔던 첫 학생은 김씨 부인이라는 어느 고관의 소실이었다. 왕비가 영어 통역을 구한다는 소문에 야심을 품고 찾아왔던 그녀는 모험만 한 채 3개월 만에 학당을 떠났다. 이러한 일은 설립된 지 20여 년 후까지도 계속되었다2). 남학교와는 달리 여성 교육의 전통이 없는 황무지에서 출발하는 1890년대의 사립 여학교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반면에 아펜젤러는 두 명의 학생을 쉽게 얻어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었다. 1885년 7월 스크랜턴이 알렌의 제중원(濟衆院)에서 손을 떼고 정동에서 독자적으로 의료사업 개척을 준비할 무렵, 제중원의 직원이던 청년 두 사람이 스크랜턴을 따라 나와 의사가 되고 싶다는 뜻을 표시했다. 이에 스크랜턴은 이들의 영어교육을 아펜젤러에게 부탁하였다3). 아펜젤러는 일기에 그 사실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지난 월요일, 8월 3일 이겸라와 고영필이라는 조선 학생 2명으로 학교사업을 시작하였다. 이 두 학생은 스크랜턴 박사가 병원에서 만난 이들로, 그들은 의사가 되고 싶어 하였고, 그렇게 되기 위하여 그들은 영어를 배우고 있다.”4)

이화학당
▲이화학당의 교사로 활동한 여 선교사(맨 오른쪽)와 조선 여학생들의 모습 ⓒ아펜젤러 사진첩
1886년 아펜젤러가 미국 뉴욕의 감리교 본부의 선교부 책임자인 리드(Dr. Reed) 박사에게 보낸 편지에는 당시 조선의 선교적, 교육적 상황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이 잘 나타나 있다.

“나는 지난주 토요일 한 학생에게 신앙에 관한 소책자를 건네주었는데 이것은 중국어로 된 것을 내가 번역하여 복사한 것이다. 그는 그것을 방에 가져가 조금 읽고, 이야기의 대강을 파악하고는 돌아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다. ‘내가 이런 종류의 소책자를 공부한다는 것이 알려지면 내 목은 달아날 것입니다.’ 양반집 자제 중 한 명은, 하나님이 비를 내렸다는 구절 읽기를 거부하였다. 어떤 젊은이들은 상응할 만한 충분한 돈을 준다면 학교에 다닐 용의가 있다고 하였다. 당시에 한 명의 학생을 한 달 동안 부양하는데 1.80달러의 비용이 소요되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5) <계속>

[미주]
1) 윤성렬, 『도포 입고 ABC, 갓 쓰고 맨손체조』, p. 21
2) 위의 책, p. 55.
3) Planted in Korea, 『The Gospel in all Lands, 1885』, p. 473.
4) 사우어(C.A. Sauer) 엮음, (자료연구회 옮김), 『은자의 나라 문에서』, 일기의 원본은 확인할 수 없고, 그의 아들 H.D. Appenzeller가 쓴, 「교육사업 50년」이란 논문에 인용되고 있다. 1934. p. 84.
5) 사우어(C.A. Sauer) 엮음, (자료연구회 옮김), 『은자의 나라 문에서』, p. 41.

김낙환 박사(아펜젤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전 기독교대한감리회 교육국 총무)